2015년 여름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이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신라 천년을 대표하는 마립간시대(5~6세기)에 고분들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속유물들과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 전성기 화려한 불교미술을 보여주는 걸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했다. 신라의 황금문화는 북방유목민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보이는 5~6세기 약 150여년간 화려하게 꽃피웠다. 마립간시대에 조성된 경주도심 신라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귀걸이, 금목걸이같은 금은제 장신구와 화려한 유리제품 등이 출토되고 있다. 마립간 시대의 화려한 금속공예품을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던 유행은 불교가 받아들여지면서 탑의 사리엄장구나 금동불상 등 불교공예품을 공양하는 것으로 점차 바뀌게 된다.
‘봉황대에서 금관총을 바라보다’,
일제강점기(1924년)에 일본이 그린 금관총과 주변 풍경이다. 금관총이 위치한 노서동 일대는 경주 도심 주택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도심 주택가에 있던 고분에서 금관의 출토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라의 황금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금관을 들 수 있는데 신라고분에서는 5점의 금관이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었으며, 도굴된 것을 압수한 1점을 포함하여 총 6점의 금관이 남아 있다. 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수량이라고 한다. 신라 금관은 금판을 오려 붙여서 만든 것으로 아래쪽에는 관테가 있고 위쪽에는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는 세움장식으로 구성된다. 신라의 황금문화는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에서 기원하 몽골의 선비족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금관의 형태는 시베리아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정신세계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일제강점기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다른 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복원해 놓고 있지 않다.
신라 황금문화의 발견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의 한 민가에서 증축공사를 하던 중 옆의 신라무덤에서 진기한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제대로 된 조사를 거치지 않고 당시 경주에 있던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수습되었습니다. 10월에 들어서 서울 조선총독부의 전문가들이 내려와 조사하고,처음으로 신라 금관이 나왔다고 하여 무덤의 이름을 금관총(金冠塚)이라고 지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금관총을 ‘동양의 투탕카멘 왕릉’이라며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경주의 신라 무덤은 1900년대 초부터 학술조사라는 미명 아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일본인들에 의해 무단으로 파헤쳐졌습니다. 특히 금관 등 황금유물의 발견은 신라 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경주 지역의 능묘에 대한 발굴조사가 활발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3년 경주에 금관고(金冠庫)를 짓고 금관총의 화려한 출토품들을 전시함에 따라 경주는 주요 관광지가 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이 개관했습니다. 천년 넘게 땅 속에 묻혀 있던 신라의 황금문화는 이렇게 발견, 전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1.황금문화
신라에 대한 문헌기록은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와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본 사료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두책을 바탕으로 신라에 대한 저술과 경주의 지리지가 다수 편찬되었는데,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이 투영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편, 신라를 민족사의 정통으로 여기면서도, 구체적 측면에서는 지식과 정보가 단절되거나 잊혀져 단지 폐허로 인식되거나 관념 속의 오래된 과거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적 표상으로서 신라가 부각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부터였습니다. 서양의 근대적 학문인 실증적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신라의 문화가 재조명되며 ‘문화재’라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21년의 신라 금관의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을 비롯해 처음 보는 신라의 황금 유물들이 세상에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이미지는 인쇄술과 사진의 발달로 인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귀걸이, 국보, 신라 6세기, 경주 보문동 합장분.
삼국시대 신라 황금문화 절정기인 6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뛰어난 금세공기술과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인 관학자 세키노 다사시(關野 貞)가 이끄는 조사단이 1915년에 조사한 보문동 합장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신라가 황금문화로 처음 주목받게 된 대표적 발견품입니다. 굵은 고리에 수백개의 금알갱이로 거북등무늬와 세잎무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굵은 고리 귀걸이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화려하여 완숙기에 접어 든 신라의 금속공예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제관식, 국보, 신라 5세기, 경주 금관총.
일제강점기에 금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로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관모의 앞부분에 꽂아 사용했던 꾸미개로 새가 날개를 펼친 모습과 비슷합니다. 고구려인뿐만 아니라 신라인들도 깃털이나 새날개 모양의 장식을 즐겨 사요용하였음을 보여줍니다. 3매의 금판을 결합하여 만들었습니다. 안팎에 달개를 달았고 테두리에는 2줄의 연속점무늬를 베풀었습니다. 가운데 장식판의 상부에는 간략화된 용무늬를 맞새김하였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 금제허리띠와 드리개.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 존재를 처음 알려준 유물이다. 일제강점기 경주 도심 노서동 주택가에 위치한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금관, 국보, 신라 5세기, 경주 금관총.
‘出’자 모양 나뭇가지 장식과 실제 나뭇가지장식, 곱은옥과 달개장식 등 신라 금관 형식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뭇가지장식은 사슴뿔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둥근 관테 위에 ‘出’자형의 나뭇가지 장식 3개와 실제 나뭇가지 형태의 장식 2개를 붙여 세웠습니다. 이 장식들은 천상과 지상을 잇는 일종의 우주목(宇宙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금관은 5~6세기에 주로 제작되었으며, 왕뿐만 아니라 왕비 등 왕족들이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금관은 금관총을 시작으로 금령총(1924녀), 서봉총(1926년), 교동(1972년 입수), 천마총(1973년), 황남대총 북분(1974년)에서 출토된 총 6점이 알려져 있습니다. 금관총 금관은 고식(古式)인 황남대총 금관에 이어 신라 금관의 정형이 완성된 단계의 것입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제 허리띠와 드리개, 국보, 신라 5세기, 경주 금관총.
황금문화를 꽃피웠던 5~6세기 신라인들의 출신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 허리띠에 매고 다녔던 생활도구들을 표현하고 있다. 곱은옥, 향주머니, 물고기 등의 장식이 보인다.
옆에서 본 모습(왼쪽)
옆에서 본 모습(오른쪽)
<뒤에서 본 모습>
금제 허리띠와 드리개는 금관과 한 조를 이루어 출토됩니다. 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허리띠의 뒷부분에는 원래 천이나 가죽을 덧대었던 것이지만, 모두 부식되어 버리고 띠꾸미개인 금속 부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드리개 끝에는 향낭(香囊), 곱은옥, 물고기, 맞새김한 용 등의 장식을 달았습니다. 이 장식들은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과 관련이 있으며, 당시 왕이 관장했던 일들을 상징화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목걸이, 보물, 신라 6세기, 경주 노서동 215번지 무덤.
금관총이 있는 노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황금문화 전성기의 화려한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1933년에 조사된 노서동 215번지 무덤은 6세기 전반 무렵 왕족 여성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교한 금세공기술을 보여주는 이 목걸이는 작은 금구슬들을 꿰어 만들었습니다. 금구슬 각각은 아주 작은 고리들을 서로 붙여 둥글게; 만들고 달개들을 매달았습니다. 맨 아래쪽에는 비취색의 곱은옥 1점을 매달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반환되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 황금제품의 성분
X선 형광분석기를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 신라 황금제품에는 금뿐만 아니라 10~20%의 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금은 무르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금에 은을 더하는 방법으로 강도를 조절하거나 다양한 금빛을 띠게 하였습니다. 5세기에 만든 금관총 금관은 세움장식 부분의 금 함유율이 85.4%(순도 20k)로 측정되었습니다. 6세기에 제작된 천마총 금관의 금 함유율도 평균 83.5%(20k)로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마총 금제관모의 경우, 금의 비율이 79.0%(19k)이어서 금관보다 금이 덜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날개 모양 관모꾸미개의 경우, 금관총의 것은 금 함유율이 평균 87.1%(20k)로, 천마총의 것은 82.9%(19k)로 조금 낮게 측정되었습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나비모양 금제 관모꾸미개의 금 함유율은 79.5%(19k)로 나와 금관총과 비교하여 차이가 납니다. 또한 서봉총 출토 금제품들의 성분분석 결과, 금관과 금허리띠 등은 부속구마다 순도가 동일하지 않음이 밝혀졌습니다. 각 구성품의 역할을 감안하여 합금비를 달리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금함유율의 차이는 금제품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차이가 기능과 관련된 것인지, 시대 변화와 관련된 것인지는 앞으로 밝혀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