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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광한루(보물), 호남을 대표하는 관아 누각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광한루(廣寒樓, 보물)이다. 남원도호부 관아에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에 경치가 좋은 곳에 세운 누각이다. 조선 세종 때 황희가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인조 4년(1626)에 고쳐 지었으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웠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4칸으로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이다. 소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에 올라 멀리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를 바라보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크게 유명해졌다.  남원은 도호부사(종3품)가 수령인 고을로 주위 10여개 고을을 관할하는 역할도 있었다. 춘향전에 나오는 변사또는 지방수령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직위이며, 과거에 급제한지 얼마되치 않은 초짜 암행어사가 혼내줄 수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런 암행어사가 있었으면 하는 민간의 바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남원 광한루(보물)>

지방 관아에서 운영했던 누각 중에서도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다. 하천 물을 끌어들어 인공적으로 정원을 조성하였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4칸규모이다. 옆쪽에 온돌방이 있는 앞면 2칸 규모의 부속건물을 달았다. 누마루는 사방이 뚫려 있으며, 난간으로 둘렀다.

<옆에서 본 모습(서쪽)>

<옆에서 본 모습(동쪽)>

<광한루 현판>

서까래가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기둥>

건물을 바치는 바깥쪽 전면부 기둥은 석재를, 안쪽은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옆면 바깥쪽은 석재 기둥 위에 목재 기둥을 올려놓고 있다.

<동쪽 부속건물>

동쪽에 2칸짜리 건물을 달아내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증축한 것이라 한다. 누각과는 달리 온돌이 있는 방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출입문>

뒷편에는 칸이 있는 계단을 만들어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이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구한말에 설치한 것이라 한다.

<뒷편 ‘호남제일루’ 현판>

<계단>

일반적인 계단을 아니고 마루를 설치하여 계단처럼 사용하고 있다.

<광한루 내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넓은 공간이다. 이곳에서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가 연회를 갖거나 통영 세병관이나 여수 진남관처럼 긴급 사태시 주위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열렸던 연회의 모습에서 남원부사의 이미지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계관(桂觀)이라고 적힌 현판>

<내부 ‘광한루’ 현판>

<분합문>

누각은 사방이 트여있어 주변의 훌륭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로 주로 경복궁 경회루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규모가 큰 고을의 관아에서 세운 것이 대부분이며,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가 유명한 지방의 누각이다. 지역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접대나 지역내 유력인사들 위한 공식적인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전쟁때에는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뒤에서 본 모습>

남원 광한루는 아름다운 정원과 함께 오랜 세월동안 명승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누각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치가 빼어난 강변 등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해 광한루는 정원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그 중심에 누각을 세웠다. 광한루 정원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는 조선사회에서 광한루 정원이 오랜 세월동안 큰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종때 명재상으로 존경받는 황희 정승이 이 곳을 처음 조성했기때문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광한루의 화려함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 광한루원(명승)>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