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들의 거처였던 양화당 아래쪽에는 후궁들의 거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춘헌과 집복헌이 있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정조가 자주 머물렀고, 승하한 장소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서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원래는 2개의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순조 때 큰 화재로 불탄 것을 현재의 모습을 중건하였다. 이 건물은 기본적으로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가옥으로, 양반 사대부들이 살았던 한옥과도 다른 형식이면서 일반 궁궐건물과도 다른 궁궐내 후궁들이 살았던 가옥의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바뀌었을 때 사무실로 사용하면서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형태는 동궐도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1980년대에 크게 수리하여 고풍스런 느낌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두 건물은 행각으로 연결되어 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독립된 건물들로 후궁들이나 왕실가족들이 살았던 행각들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궐도에 표현된 영춘헌과 집복헌>
대비 거처였던 양화당 주변에는 후궁들과 왕실가족들이 살았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영춘헌>
영춘헌은 정조의 효심이 잘 나타나고 있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 옆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하여 만천하에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고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했던 의지가 드러나는 곳이다. 물론 옆에 있던 양화당의 대비가 보란듯이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정조는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앞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7칸의 큰 건물로 양반가의 저택처럼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순조대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사랑채 형태를 하고 있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앞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옆면>
영춘헌은 옆면도 6칸 규모의 건물로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데. 옆면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없다.
<집복헌>
집복헌은 1735년 사도세자가, 1790년 순조가 태어난 곳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후궁 영빈이씨, 순조의 어머니는 후궁 수빈박씨로 후궁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진다. 집복헌은 조선시대 궁궐 건물 중 후궁처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지붕은 높지 않고 양반가옥과는 달리 바깥쪽으로 툇마루 등을 달아 내어 놓지 않고 있다. 궁궐 건물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검소하면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원래 영춘헌과 별개의 건물이었는데, 순조대 중건하는 과정에서 영춘헌과 붙혀 놓아 행각처럼 사용하고 있다.
<출입문>
영춘헌과 집복헌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왼쪽편에 있다. 집복헌은 앞면 5칸, 옆면 5칸의 ‘ㅁ’자형 건물이다. 마당은 넓지 않고 크고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궁들의 처소로 상궁.궁녀들과 같이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마당>
<대청마루>
‘ㅁ’자형 주택의 마당과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각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엌은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후궁 처소로 독립적인 생활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뒷마당>
양화당이나 통명전과 마찬가지로 뒷마당에 계단식 정원인 화계를 조성해 놓았다.
<영춘헌과 집복헌 뒷편으로 올라가는 길>
동궐도에서는 건물 뒷편에 장독들을 보관하는 장고(醬庫)가 있었다. 창경궁에는 많은 왕실가족들이 살았기때문에 통명전 서쪽편 언덕과 함께 2곳의 장고를 두고 있다.
창경궁 통명전과 양화당 일대는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이 어른이 거처하는 곳이자 많은 왕실 가족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이었다. 궁궐에 머물렀던 사람들로는 국왕과 왕비, 세자와 가족들, 어린 왕자들, 많은 후궁들, 대비를 비롯한 선왕대의 후궁 등과 이들에 딸린 많은 궁녀와 왕을 호위하는 내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린 후에는 동궐 중 창경궁과 서궐인 경희궁 일대가 궁궐에 속한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창경궁에는 이들이 살았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집복헌과 영춘헌>
영춘헌과 집복헌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밀집된 영역이었다. 영춘헌과 집복헌도 후궁의 거처였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834년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거처로 추정되는 작은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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