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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휘릉(徽陵, 사적),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휘릉(徽陵)이다.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현종의 숭릉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봉분 주위에는 12지신상이 새겨진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북모양이 고석이 조선초기 왕릉양식이 따라 5개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국왕 장례절차를 둘러싼 당쟁이 심했던 숙종대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있었는데, 서인과 남인사이에 상복을 입는 기간을 가지고 큰 논쟁을 벌렸던 예송논쟁의 당사자이다. 숭릉과 마찬가지로 능역조성 과정의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동구릉에 능역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리 동구릉 휘릉(사적)>

구리 동구릉에 있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이다. 장렬왕후는 상복을 입는 기간을 대해 정파가 극심한 논쟁이 있었던 예송논쟁이 당사자이다. 능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이곳 동구릉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다른 왕릉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 양쪽과 배위청 앞으로 1칸씩 건물을 달아내어 앞면 5칸 규모를 하고 있다.

<정자각 내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 다른 정자각에 비해 길다.

<수복방이 있던 건물터>

<정자각 뒷편 표석이 세워진 비각>

<봉분>

봉분은 현종의 숭릉과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 12지신상이 새겨진 난간석을 봉분 주위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이 5개이다. 조선초기 왕릉 혼유석의 양식을 적용했다.

동구릉(사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구리 동구릉 재실>

구리 동구릉 휘릉, 사적,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제16대 왕 인조의 두번째 비인 장렬왕후(1624~1688)는 1638년(인조16)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 장렬왕후는 제17대 효종과 제18대 현종, 제19대 숙종 대까지 살았으며, 1688년(숙종14) 창경궁에서 돌아가셔서 휘릉에 안장되었다. 장렬왕후가 4대에 걸쳐 왕실의 웃어른이 되면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하여 논쟁이 두차례 일어났다. 1659년 효종이 돌아가시자 효종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고, 1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서인이 실권을 잡았다. 1674년 장렬왕후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인선왕후가 돌아가시고 또다시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때에는 남인의 주장대로 1년동안 상복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차례의 논쟁은 예송논쟁이라고 하며 예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 문제로 확산된 역사적 사례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