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조선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가 모셔진 능이다.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 형식으로 1758년(영조34)에 재정리하여 완성한 <국조상례보편> 왕릉제도를 충실히 구현하였다. 영조는 18세기의 절반인 52년을 재위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왕으로 평가받기는 하지만, 그 또한 당쟁에 휘말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원비인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을 숙종의 능이 있는 서오릉에 조성하면서 자신도 그곳에 묻히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는 숙종을 계승했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영조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의 능을 선왕의 의지에 반하여 동구릉에 조성했다. 이는 당시 나름 실세였던 정순왕후의 의사도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리 동구릉 원릉>
조선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숙종의 명릉이 있는 서오릉에 자신의 능역을 마련했으나 영조과 같이 묻히고 싶어했던 정순왕후의 의도가 반영되어 이곳에 능이 조성되었다.
<동구릉내 원릉 들어가는 길>
원릉은 동구릉 입구 재실에서 멀지 않은 동구릉 영역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숙종의 명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 양쪽에 익랑을 두지 않고 있다. 영조 때 재정리된 <국조상례보편> 왕릉제도가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수복방 건물터>
<표석이 세워진 비각>
비각에는 3개의 비석이 있는데, 첫번째 것은 원래 묘호인 영종, 2번째것은 대한제국 선포이후 묘호인 영조가 적혀 있으며, 나머지는 정순왕후의 것이다.
동구릉(사적)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동구릉 재실>
구리 동구릉 원릉, 사적, 경기 구리시 인창동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1694~1776)는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긴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1724년 제20대 왕 경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연잉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 여러 방면에서 치적을 남기는데 정치적으로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이 융합하도록 노력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영조의 비는 정성왕후와 정순왕후 두 분이 있다. 정성왕후는 1704년(숙종30)에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와 혼인하였으며, 1757년(영조33)에 돌아가셔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에 안장되었다. 본래 영조는 정성왕후 홍릉 옆을 비워두어 자신이 안장될 터로 여겼으나 두번째 비인 정순왕후와 현재 지역에 안장되었다. 정순왕후(1745~1805)는 15세에 당시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1800년에 정조가 돌아가시고 어린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3년간 나랏일을 돌보았다.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1758년(영조34)에 완성된 <국조상례보편>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였으며,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직접 쓴 표석이 남아 있다.<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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