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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洪陵, 사적),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 사적)이다. 대한제국 1대 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때문에 황제의 예를 따라서 조성했다.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형의 앞면 5칸짜리 침전을 세워 놓았으며,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 대신 침전 앞 참도 양쪽으로 문.무석인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석상을 순서대로 세워 놓았다. 참도도 기존에 어도와 신도로 되어 있던 것을 삼도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재실 또한 왕릉 앞으로 옮겼다. 건물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며, 재궁이라 부른다.

고종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이후 능역 조성을 미루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청량리 부근에 홍릉을 조성였다.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겼고,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고종은 남양주 금곡동에 새 능역을 정하고 황제국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 능역조성을 시장하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이곳에 능을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능과 합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이지만, 고종 생전에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능역을 조성해 왔으며 고종 사후 3.1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좋지 않아 일제가 고종이 추진하던 내용대로 홍릉을 조성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기간 동안 외세에 휘둘리면서 조선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능역의 규모는 이전 왕릉에 비해서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남양주 고종 홍릉(사적)>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능인 홍릉. 기존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제사시설로 앞면 5칸짜리 큰 건물인 침전을 세우고,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연결된 참도 또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 주위에 있던 석물들도 대부분 침전 앞으로 옮겨졌으며, 기존의 석양, 석호 대신에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참도 양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홍릉 들어가는 길>

바닥에 돌을 깔고 양쪽에 개울을 만들어 놓고 있다.

<홍릉 입구 연못>

조선의 전통 정원 연못과는 달리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홍릉 입구 금천교>

기존 왕릉과는 달리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이는 신성한 영역을 넓게 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은 금천>

<홍릉 능역>

<홍살문>

<홍살문에서 침전으로 연결되는 참도>

삼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며 봉분 앞에 있던 석물들이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침전이 신위가 모셔진 공간임을 말해준다.

<침전 월대 아래 서 있는 문석인과 무석인>

기존 왕릉과 달리 제향의 의미를 갖는 향나무가 침전 앞에 심어져 있다.

<석물>

황제의 능으로 격상되면서 봉분지위에 있던 석물 대부분이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은 없어지고, 문.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석상이 순서대로 세워져 있다.

<침전>

기존 왕릉 제사시설인 정자각 대신 홍릉에는 ‘-‘자형으로 침전이 월대위에 세워져 있다. 침전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궁궐 정전 형태를 하고 있다.

<왼쪽에서 본 모습>

<침전 내부>

침전내에는 기존의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처럼 왕이 머무는 장소인 닫집에 신위를 모신다.

침전
이 건물은 조선26대 고종황제의 신위를 모신 제전이다. 중국을 섬기는 제후 국가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 역대의 건물과는 건물의 형식과 규모가 다르다. 즉 종래의 ‘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문관과 무관 모습의 문무석이 서 있다. 그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 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침전 옆 표지석이 있는 비각>

<홍릉 표지석>

기존 왕릉 표지석과 큰 차이는 없다.

<홍릉 봉분>

기존 왕릉과는 달리 석물은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이 있다.

<홍릉 재궁>

기존 왕릉 재실이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는 반면에 홍릉 재궁은 홍살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제사 준비를 하는 수라간>

<수복방>

<중국 베이징 명나라 신종의 능인 정릉(딩링)>

홍릉이 중국 황제능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실제 명황제의 능 중 하나인 딩링은 휠씬 크고 웅장하며, 조성방법도 많이 다른 것 같다.

고종 승하와 3.1운동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1월 경운궁(덕수궁)에서 돌아가셨다.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항일운동의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은 각 종교계의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계획하여 고종의 발인을 이틀 앞두고 거행되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이 만세 운동은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하여 전국에서 상경한 민중들이 각 지방에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덕수궁 국장 화첩, 1919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고중의 국장 모습이다. 사진으로 조선시대 국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종 명성황후 홍릉,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1852~1919년), 명성황후(1851~1895년)를 합장하여 모신 능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돌아가신 후 처음에 그 능을 동구릉 안에 조성하고자 하였지만 국내외의 복잡한 사정으로 제대로 조성하지 못하였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를 대한제국의 황후로 높이고, 같은해 11월에 능 이름을 홍릉으로 새로 정하여 서울시 청량리에 모시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1900년부터 풍수상의 문제로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지역을 새 능역으로 정하여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후 1901년에는 침전이 완성되었고, 1904년까지 주요 석물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금곡 홍릉은 고종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명성황후와 합장하면서 현재 황제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