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천송리 신륵사 경내에 있는 조사당(보물)이다.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에 활동한 나옹선사를 비롯하여 무학, 나옹, 지공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고려말, 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들로 왕실과 관련이 깊은 조선 최대의 사찰인 회암사에 부도가 모셔져 있다. 현재 신륵사에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앞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신륵사는 예종 때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정해질 때 전각들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초기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건물이다.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고찰로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아닌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려말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남한강변 수운과 교통로상에는 큰 절이 많았는데 당시 신륵사는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부근에 있던 고달사가 여주지역에서는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는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던 주변의 다른 사찰들과 함께 크게 위축되었다가 예종대에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서 주변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보물)>
조선초기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질 때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앞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화려한 단청과 다포계 공포로 장식되어 있다.
<처마와 공포>
<조사당 내부에 모셔진 영정>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1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을 크게 지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부족해 보인다.
<뒤에서 본 모습>
<조사당 앞 마당>
마당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 보물,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천송리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자리잡은 신라 시대에 건립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이절이 크게 번창한 것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이 이 절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며 세상을 떠났기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절도 크게 위축되었으나 예종1년(1469)에 제4대 세종과 비 소헌왕후 심씨의 능인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후 영릉의 원찰이 되어 성종3년(1469)부터 대규모로 다시 지어졌으며 조사당은 이때 다시 지어진 것을 추정된다. 신륵사의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 사용되는 재료인 공포를 사용한 다포계 건물이다. 지붕가주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는데, 대들보 위에 가로재가 정자형으로 놓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도록한 특수한 구조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우물천정을 하였으며 뒷벽 쪽으로 불단을 설치하여 무학, 지공, 나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신륵사 조사당은 작은 규모이지만 공포의 형태와 가구수법이 특이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외곽을 가지고 있는 조선초기의 중요한 건축이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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