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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 조선시대 금속공예 (2015년)

조선시대에는 사리엄장구나 공양구같은 불교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기때문에 고려시대에 비해서 금속공예 기술이 발전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공예품 대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일상용품이나 사치품이 주로 만들어졌다. 화장그릇이나 촛대, 담배합이나 필통 등과 같은 문방구류들이 금속공예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예품을 장식하는 문양또한 불교적인 내용보다는 부귀.장수.복을 비는 도교적 성격의 십장생, 신선, 수복(壽福)무늬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금속공예에서 보여주는 화려함보다는 단순하면서 실용적인 서민적 취향의 공예품이 주를 이룬다.

<숙신공주묘 출토 화장품 그릇(銀製化粧壺, 조선 1650년경, 숙신공주묘 출토) 중 과일무늬가 새겨진 화장호>

<신선그림이 새겨진 화장호>

<화장품그릇>

조선의 17대 효종대왕의 첫째 딸인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은제 화장품 그릇이다. 숙신공주는 효종이 볼모로 만주 심양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가 병사하였다. 숙신공주묘에서는 신선무늬가 새겨진 화장호와 과일 무늬가 새겨진 화장호가 출토되었고, 과잎무늬 화장호에서는 연백(鉛白)으로 추정되는 분가루가 남아 있었다. <출차:중앙박물관>

<화장품그릇(조선, 1779년)>

원빈 홍씨는 정조2년 6월 종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이듬해 5월 스무살이 안된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합 하나는 유리로 만들어졌고 수복장녕이란 글자가 새겨진 호는 은제이며 나머지 2개의 합은 여러 색깔의 유약을 입히는 칠보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붉은 유리 그릇과 칠보무늬 화장품 그릇>

<소꼽도구(銀製完具, 대한제국)>

은으로 만든 소꼽 도구들로 제기를 비롯해 식기와 경대, 뒤주, 화병, 수막새 등을 정교하게 축소하여 만들었다. 소꿉도구들에는 음각으로 오얏꽃을 새겼으며, 소꿉도구들의 밑면에는 이왕직미술제작소에서 만든 것을 알 수 있는 ‘美’자가 새겨져 있다.<출처: 중앙박물관>

<철제은동입사 대반(大盤), 조선후기>

<철제은동입사 화로(火爐),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장생무늬 담배합,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장생무늬 담배합,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장생무늬 담배합,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나비무늬 담배합,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매화무늬 담배합, 조선 19세기>

<철제은동입사 화로, 조선 19세기>

몸체와 뚜껑으로 구성된 철제 화로이다. 몸체의 네 면에는 사슴 두 쌍, 학 한 쌍, 거북이 한 쌍이 은과 구리로 입사되어 있다. 뚜껑 측면에는 박쥐, 윗면에는 건, 곤, 감, 리의 사괘가 구리로 입사되어 있다. 몸체의 사슴과 학, 거북이는 장수, 박쥐는 복, 사괘는 천지일월을 상징한다. <출처: 중앙박물관>

<철제은입사 여의,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꽃병,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연적, 조선 19세기, 철제은입사 필통, 조선 19세기>

<청동 휴대용 먹통, 철제은입사 필통, 철제은입사 문진, 조선 19세기>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