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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편전(便殿), 국왕의 업무공간인 석어당, 즉조당과 준명당, 덕홍전

덕수궁 정전 뒷편에는 국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 편전건물로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이 자리잡고 있다. 즉조당과 준명당은 침전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편전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두 건물은 복도각으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 앞쪽에는 2층으로 지어진 석어당이 자리잡고 있다. 석어당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 대신 머물렀던 곳으로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이 건물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곳이라고 하며, 즉조당은 인조가 즉위한 건물이다. 그 옆쪽으로 서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궁궐전각인 석조전 또한 침전 겸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석어당 동쪽편에는 침전영역으로 보이는 덕홍전과 함녕전이 있는데 그 중 덕홍전은 고종이 외빈을 접대하기 위해 지은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덕수궁 석어당>

석어당은 궁궐 전각 중 많지 않은 2층 목조건물이다.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 내에서 가장 유서깊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후 불타버린 궁궐 대신 선조가 이곳을 행궁으로 삼아 머물렀던 건물이다. 또한 석어당이라는 이름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이 이곳에서 인목대비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건물자체에는 화려함을 느낄 수는 없고 소박한 기풍이 있는 건물이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아래층이 앞면 8칸, 위층은 6칸을 하고 있는 굴도리집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에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옆에서 본 모습>

아래층은 3칸, 위층은 1칸을 하고 있다. 위층 공간을 그리 넓지는 않으면서도 창문을 열고 사방을 살펴보기 좋은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처마와 공포>

단청을 하지 않고 민간 건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기둥과 창호>

<마당 한쪽편 고목>

덕수궁 석어당
편전인 석어당은 덕수궁 내의 유일한 2층 건물로 원래의 석어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 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2층 누각에서 내려 본 모습이다.서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내부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열렸고 사방은 창으로 나 있다. 중층이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출처:문화재청>

<석어당 뒷편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즉조당과 준명당>

원래는 침전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실제로는 손님을 접견하거나 업무를 보는 편전 역할을 했던 건물들이다.  즉조당은 선조때부터 있었던 건물이고, 준명당은 고종이 업무를 보기 위한 편전으로 지은 건물이다. 두 건물 모두 20세기 초인 1904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하였다. 현대식 한옥의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다.

<즉조당>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하여 궁궐 역할을 하던 건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자, 국왕이 집무를 보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즉조당은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마루방을 두고 있다. 옆에 지어진 편전건물이 준명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처럼 사용했다.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달리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리지 않는 등 궁궐건물로서의 격식을 배제하고 있는 민가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처마와 공포>

현판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 형식을 하고 있으며,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즉조당 내부>

<뒤에서 본 모습>

<준명당>

고종이 집무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원래 편전 건물이었던 즉조당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두 건물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즉조당과는 달리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던 용도로 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 또한 1904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순종의 어진을 봉안하기도 하였으며,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도 사용하였다. 건물은 앞면 6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처마와 공포>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

<즉조당과 준명당 앞 마당>

행각은 남아 있지 않고 잔듸를 심어 정원으로 꾸며놓고 있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정궁으로 중건되면서 많은 전각들이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궐과는 달리 크게 훼손되었다.

즉조당과 준명당
짧은 복도로 연결돼 있어 마치 긴 한채의 건물처럼 보인다. 정면에서 왼쪽이 준명당이고 오른쪽이 즉조당이다. 준명당은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며 다락집복도(雲閣)로 즉조당과 연결되었다. 1904년 불탔으나 같은 해 다시 지었다. 뒤에는 고종·순종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덕혜옹주의 유치원이었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임금의 집무처이다. 1904년 불타 그 해 다시 지었으며 고종 후비이자, 의민황태자 영왕(英王)의 모친 엄비(嚴妃)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즉조당 현판은 고종 어필이다. <출처:문화재청>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손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저택이 있던 곳으로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궁궐 대신 선조가 머물면서 행궁이 되었으며, 광해군이 이곳에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후 덕수궁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편전에 해당하는 석어당, 즉조당 정도 규모의 작은 궁궐이었다. 덕수궁은 구한말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많은 전각들을 세우면서 궁궐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것이라 한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긴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영국과 러시아대사관을 비롯하여 외국대사관들이 밀집한 이곳 덕수궁에 머무르기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전>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10년에 세운 서양식 석조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박물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궁궐 전각으로 복원되었다.

<덕홍전>

덕홍전은 궁궐건물 중 제일 마지막인 191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며, 고종이 손님을 접견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었다. 침전인 함녕전과 같은 마당을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덕수궁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궁궐건물로서의 웅장함을 갖추고 있다.

<공포와 처마>

<덕홍전 내부>

<내부 천장>

검은색 타일이 깔여 있으며, 칸막이가 없는 넓은 홀로 되어 있다. 함녕전과 마찬가지로 상들리제처럼 생긴 전등이 달려 있다. 내부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봉황과 오얏꽃무늬가 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덕수궁 덕홍전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원래 명성황후의 빈전인 “경효전”이 있던 자리에 1911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덕수궁 안에서 가장 나중에 지은 건물이다. 기둥머리에 새날개 모양의 익공을 2개 설치한 이익공의 간략한 구조이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