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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절터 부근에 남아 있는 탑비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법경대사탑비(보물)이다.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전통적인 탑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거북받침돌에 표현된 용의 얼굴이나 몸통,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가운데에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아랫쪽에 있는 정토사지 절터에 있던것을 충주댐 건설로 절터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법경대사 현휘(玄暉, 875~941년)은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활동했던 승려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가르쳤다. 국사로 대우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고려 태조는 ‘법경(法鏡)’이라는 호를 내렸으며, 탑이름은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이었던 구족달이 구양순체로 글을 썼다. 법경대사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국내에는 남아 있지 않다.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당나라 탑비 양식이 잘 반연되어 있는 고려초에 세운 탑비이다. 전체적인 조형미나 세부 조각수법 등이 양호하다.

<비몸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돌>

얼굴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몸통을 받치는 발은 형식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뒤에서 본 거북받침돌>

등껍질에 새겨진 육각형의 무늬에서 전통적인 비석받침돌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법경대사의 행적이 새겨진 비몸>

당대 문장가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 구족달이 글씨를 썼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글자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를 보여주고 있다.

<머릿돌>

머릿돌에는 ‘법경대사’라는 탑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용의 형상을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옆쪽에서 본 탑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모습>

탑비는 원래 부근 정토사지 절터에 있었는데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뒷편에 있던 큰 나무가 옛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비슷한 것으로 볼 때 절터는 현위치에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

<탑비가 옮겨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마을>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절골
충주댐 수몰지역 내 정토사지에 있던 비를 1983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로 옮겼는데, 고려 태조 26년(943)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법경대사는 신라말 ~ 고려초의 고승으로 정토사를 창건, 포교에 힘썼고, 고려 태조 7년(924)에 국사로 추대되었으며, 태조 24년(941)에 63세로 돌아가시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이라는 호를 내리고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구족달이 써서 건립하였다. 이 비문에는 충주를 ‘중주’로 표기하고 있어, 탑평리 7층석탑을 중앙탑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 지역이 한반도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퍼지는 빛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영혼이 천상의 세계로 인도됨을 의미하는 두마리 용을 조각한 비의 머리 등은 고려초기 석조미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 법경대사자등탑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같이 있던 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남아 있지 않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출처>

  1. 충주시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