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상리마을에 있는 성삼문 유허이다. 그의 외가가 있던 마을로 “아이를 낳았느냐”고 하늘에서 세번 물었다는 출생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는 장소이다.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어 그가 태어난 집은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때 그를 기리기 위해 노은서원이 세워졌으며,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휴허비가 세워졌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노은서원은 없어지고 대신 위패를 묻은 노은단이 세워졌으며, 그 옆에는 최근에 지은 숭문사라는 사당이 있다. 마을에는 성삼문의 외손자 엄찬이 살았다는 고택이 남아 있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조선 세종 때 집현적 학자로서 한글 창제 등 당시 세종이 이룩한 업적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세조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홍성 성삼문 유허>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던 마을로 집터와 유허비, 노은단 등이 남아 있다.
<공터로 남아 있는 집터>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노은서원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
<유허비>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선생 유허비
이 곳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번 물은 일이 있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1456년(세조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668년에 민유중이 홍주 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현재의 홍북면 노은리 상리부락)에 돌로 추모의 표시를 하였는데, 뒤에 송시열이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상이 썼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집터 뒷편 노은단>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지면서 서원에 모셨던 사육신의 위패를 묻은 곳이다.
<노은단 오르는 길>
<노은단 현판>
<위패를 묻은 노은단>
<숭문사>
노은단 앞쪽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사당인 숭문사가 있다.
<숭문사 사당>
<유허 옆 노은리마을>
이곳에는 그의 외손 엄찬이 살았다는 고택이 남아 있다.
<엄찬 고택>
성삼문의 외손 엄찬이 살았다는 곳에 남아 있는 고택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성삼문 선생 유허
성삼문 선생의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676년(숙종2)에 이옥량이 선생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우를 세우고 녹운서원이라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았고 뒤에 노은이라 바꾸어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 헐리게되니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묻고 노은단이라는 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15일에 제향을 하고 있다. (안내문, 홍성군청,2010년)
<출처>
- 홍성군청
- 문화재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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