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김옥균 유허이다. 이곳에는 그의 무덤과 그를 기리는 작은 사당이 세워져 있다. 그의 양자였던 김영진이 194년 아산군수로 재임할 때 일본 도쿄 청산외인무덤에 있었던 그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무덤이 있는 곳은 옛 아산현 읍치 뒷편 작은 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과 협력하여 개화운동을 했던 까닭에 일제강점기에 그의 양자가 아산군수를 지내면서 무덤을 옮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옥균 선생은 구한말 개화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천진에서 수구파 자객에게 암살당한 후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갑오개혁 이후에 복권되었다. 그의 사상과 실천방법이 반드시 옳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당시 사회 변화를 이끌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흥선대원국과 함께 구한말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옛 아산현 읍치 뒷동산에 있는 김옥균 무덤>
이곳은 그가 살던 곳은 아니지만 그의 양자가 아산군수로 재임할 때 일본에서 이곳으로 무덤을 옮겼다.
<김옥균 무덤 앞 석물들>
<무덤 아래에 있는 사당>
<사당>
<무덤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아산현 읍치 일대>
<서울에 있는 우정총국 건물>
김옥균은 이곳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선생 유허,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한말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였던 고균 김옥균(1851~1894년)의 묘소이다. 일본 청산의 외인묘지에 있던 것을 1924년 9월 11일 현재의 위치로 무덤을 옮겼다.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오경석.유흥기 등과 함께 개화사상을 익혀 승정원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삼.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나라의 자주 근대화에 힘을 다하였다. 그는 자주 부강한 근대국가 달성이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 믿고 정치 전반에 걸치 대대적인 개혁을 국가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을 단행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청나라 군사 1,500명의 무력진압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다시 1894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0년)
<출처>
- 아산시청
- 문화재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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