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선사유적지(사적)이다. 한반도에서 조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지 중 한 곳으로 기원전 6,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작은 석호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낙산사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4 km 정도 떨어졌다. 유적지에는 당시의 집터와 복원한 움집, 유물전시관 등이 있는데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주변 지형과 자연환경 등을 살펴보면서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1977년 호수를 매꾸어서 농지로 전용하는 공사중에 다랑의 석기와 토기 조각들이 출토되면서 유적지의 존재가 알려졌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집터 11기, 불피웠던 자리 5기, 돌무지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어로생활을 했던 낚시도구, 돌칼 등과 가장 오래된 토기 중 하나인 덧무늬토기 등이 있다. 함경도와 연해주 등에서 살았던 신석기인들과 그 기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성 문암리, 속초 조양동, 강릉 초당동과 함께 동해안을 대표하는 선사유적지이다.
<양양 오산리 유적지(사적)>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지 중 한곳이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동해바다와 만나 석호 주변 늪지에 위치하고 있다. 남대천 연어를 쫓아서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에 재현에 놓은 집터, 불피웠던 자리>
<유적지에 재현해 놓은 움집>
14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원형에 가까운 평면을 하고 있다.
<움집내부>
가운데 불을 피운 흔적이 있다.
<옆쪽에서 본 움집>
<불을 피웠던 자리 (재현)>
신석기인의 움집(수혈주거)
신석기시대 움집의 평면형태는 둥글거나 혹은 네모서를 줄인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지름 또한 한 변의 길이가 5~6 m 정도로 면적이 20~30 m² 정도였으며 대략 4~5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졌으며, 그 위에 마른 풀이나 짐승 가죽 등을 깔고 생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안 가운데의 화덕자리는 음식물의 조리뿐만 아니라 실내를 따뜻하게 하거나 밝게 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유적인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14기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대체로 직경 6 m 가량의 원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래로 된 바닥에는 5 cm 정도의 두께로 점토를 깐 다음 불을 놓아 단단하게 처리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좁고 긴 돌을 여러 개 돌려 만든 네모난 화덕자리가 1~2개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5기의 야외노지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의 돌들은 오랫동안 불을 맞아서 깨어지거나 갈라진 채로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일종의 공동취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지의 형태는 대부분 1.5~3.4 m 의 원형이나 타원형으로, 20~30 cm가량 바닥을 파고 그 위에 여러겹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움집터는 오산리 유적을 비롯하여 서울 암사동, 충북 쌍청리, 부산 동삼동, 황해도 봉산 지탑리 등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 움집터는 한 유적에 몇개씩 모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중에는 서로 겹쳐 있는 예도 있어 한 마을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새로운 집을 지으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양양군청, 2011년)
<유적지 일대 늪지>
유적지 일대는 석호가 늪지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경포호나 영랑호 등과는 달리 퇴적이 많이 진행되어 늪지처럼 보인다. 바다에서 회귀한 연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어종의 물고기와 철새들이 많았으며, 신석기인들이 살기에 풍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수였던 늪지>
이 곳은 쌍호라고 불리우며 농지로 변한 부분을 포함해서 상당히 넓은 석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양양 오산리>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토기인 덧무늬 토기이다. 어로생활을 하던 동해안, 남해안 신석기인들이 사용하던 토기이다.
<바리, 양양 오산리>
토기의 출현
토기는 인간이 흙과 불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 발명 이전에는 나무와 갈대, 가죽 등으로 그릇을 만들어 식량을 담거나 운반하는 데 이용하였다. 새로이 토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음식물의 가공법이 발달하였고, 음식물의 종류도 많아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는 기원전 6,000년 무렵의 덧무늬 토기로 알려져 왔다. 덧무늬토기는 겉면에 진흙 띠를 붙여 무늬를 만든 것으로,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기원전 8,000년 무렵의 새로운 토기가 발굴됨에 따라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작 연대가 앞당겨지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누른무늬토기>
기원전 4,000~3,000년 무렵에 사용한 토기로 아가리 주변에만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벌려서 무늬를 넣은 것이다.
<나뭇잎이 찍힌 토기,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빚는 방법으로는 손빚기법과 테쌓기법, 서리기법 등이 있다. 토기를 빚을 때는 받침대로 고래 척추뼈나 넓적한 돌, 원반형 토제품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 토기 받침대와 토기 바닥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받침대 위에 넓적한 나뭇잎을 깔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토기 바닥면에 나뭇잎 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가락바퀴, 3. 양양 오산리, 4. 강릉 하시동>
신석기인들의 어로생활을 보여주는 유물로 그물을 꿰었던 가락바퀴이다.
<동물토우, 양양 오산리>
<인물토우, 양양 오산리>
<유적지 동쪽 해안 모래언덕에 위치한 솔비치콘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 사적,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이 유적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은 측정연대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 초기 단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77년 처음 발견된 후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6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집터의 모양은 신석기 시대의 다른 유적이 움집인 것과는 달리 바닥이 둥근 형태의 지상가옥으로 밝혀졌다. 출토 유물 중, 토기는 아가리 부분에만 덧 띠를 붙이거나 눌러찍기로 무늬를 낸 납작바닥의 토기가 대표적이며, 석기는 이음낚시도구, 돌칼 등 해양어로 생활에 쓰인 도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양양군청, 2011년)
<참고문헌>
- 양양군청
- 중앙박물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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