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울산왜성이다. 태화강과 동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나즈만한 언덕에 쌓은 성곽으로 전형적인 일본 성곽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곽은 정상부에 본성을 쌓고 그 아래에 외성을 두고 주변으로 토루를 두고 있다. 성벽은 기존의 울산 병영성과 읍성의 돌을 허물어서 옮겨 쌓았다. 석축을 쌓는 방법이나, 성문의 구조, 성벽의 모퉁이를 모나게 돌출시키는 등 전형적인 일본 성곽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 아래에 태화강변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작은 선착장을 두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에서 한동한 사용하였으며 시루를 엎은 모양이라 해서 시루성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지금은 해제되었다.
울산 왜성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가토 기요마사가 보급과 지역방어를 위한 거점으로 쌓았다. 그 해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거의 궤멸직전까지 몰렸으며 이때 왜군은 오줌을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와와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을 이끌고 침략했던 왜장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중 한명이다. 성곽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뛰어났던 인물로 일본 3대 성곽으로 손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였으며, 조선의 읍성을 참조하여 구마모토에서도 읍성을 쌓기도 했다.
<울산 왜성>
울산 태화강변에 있는 왜성으로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큰 전투가 있었다.
<울산 왜성 공간배치>
태화강과 동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나즈막은 언덕에 쌓은 성곽이다. 언덕에 본성을 쌓고 그 위에 외성을 쌓았으며, 외곽에는 해자를 파고 토루를 쌓았다. 태화강변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작은 선착장을 두고 있다.
<울산왜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벌였던 전투를 그린 그림>
울산성 전투는 임진왜란에서도 아주 중요했던 전투로 왜군을 이끌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주력군이 궤멸 직전까지 갔던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전투도
우리나라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7년 12월 23일 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1598년 9월21일 부터 25일 까지 두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빼앗지 못하였다. 특히 첫번째 전투 때에는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가 이끄는 명나라군과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5만 7천명은 막 축조공사를 끝낸 울산왜성을 급습하였다. 성안에는 약 1만 6천명의 왜군이 있었는데, 이 성에 갇히어 고립된 일본군은 식량이 바닥나고 물마저 떨어져 전멸직전까지 몰렸다. 이에 종이와 흙벽을 끓여 먹는 한편, 군마를 찔러서 그 피를 마셨으며 군마가 없어지자 마침내 오줌을 마셔서 목을 축이기도 하며 겨우 버티었는데, 연일 계속된 전투와 추위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그린 [울산성전투도]는 울산성에 갇힌 왜군을 구원하기 위해 김해 죽도왜성에서 달려 온 사가현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휘하의 화공에게 시켜 만든 그림이다. 원본은 1847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되고 현재의 그림은 1886년 오쿠보 세츠도가 제작한 작품이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입구>
성곽은 태화강변과 가까운 동남쪽에만 출입문을 두고 있다.
<본성 출입구>
‘ㄱ’ 형태로 전형적인 일본 성곽의 출입문 형태를 하고 있다. 석축 양쪽에 누각건물을 올려 놓은 아구라몬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성 출입구
이 출입구는 울산왜성의 본성인 주곽부와 외곽부를 연결하는 것이다. 평면형태는 안으로 꺾여 들어간 ‘ㄱ’자형태로 마스가다 고구치라고 부르며 당시 일본 성곽에서 가장 발달한 형식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외부에서 문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불안감을 주며, 이곳을 통과하는 공격자에게는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구조이다. 성문은 유구의 형태로 보아 석축과 석축 사이에 누각 건물을 걸쳐 놓고 그 아래에 출입문을 설치한 이층문(櫓門, 아구라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본성 출입문 옆쪽으로 쌓은 성벽>
조선의 성곽과는 달리 성벽을 비스듬하게 쌓고 있다. 성벽은 울산읍성과 병영성 성벽돌을 옮겨다 쌓았기 때문에 조선의 성벽과 비슷하면서도 일본 성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성 출입문 옆 선착장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
<선착장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선착장이 있던 곳은 지금은 주택가로 바뀌어 있다. 지금은 태화강과 200 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선후기에는 조선 수군이 울산왜성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곳에 배를 정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선입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은 강이나 해안가에 성을 쌓고 본국에서의 보급이나 연락, 유사시 퇴각을 위해 배를 댈 수 있는 항구를 가장 우선적으로 확보하였다. 그 당시 바닷물이 울산왜성의 구릉 아래까지 들어왔으므로 태화강과 면한 성의 남쪽에 ‘凹’자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고 담장과 목책을 둘러 몇척의 작은 배를 상시 정박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은 토지구획정리 사업 후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서 대부분의 유구가 훼손되었지만 그 흔적만을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본성을 오르는 산책로>
경사진 언덕이 성벽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성 아래 성벽>
본성 바로 아래에는 장성 형태로 경사진 성벽 쌓았다. 조선의 성곽과는 전혀 다른 축성법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
능선을 따라서 경사지게 성벽을 쌓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경사형 성벽
경사지를 따라 쌓은 장성 형태의 성벽을 일본 성곽용어로 ‘노보리이시가키’라고 부르며, 왜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꼽는다. 울산왜성에서는 본환 남쪽 성벽에서 선착장까지 능선을 따라 긴 경사형 성벽으로 연결함으로써 유사시 선착장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고, 본환에서 선착장까지 이르는 안전한 통행로가 확보될 수 있게 하였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본성 성벽>
일본 성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본환이라 불린다. 해발 50 m 정상부에 쌓은 성벽으로 둘레는 763 m이다. 위에는 담장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급하게 쌓은 성곽으로 일본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천수각이 없다.
<동쪽편 본성 성벽>
형태는 일본 성곽을 하고 있지만, 아래의 구마모토성과는 달리 성벽돌은 조선의 성벽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일본 구마모토성 본환>
본환(本丸)
본환은 울산왜성의 주곽부를 구성하는 세 개의 소곽 중 가장 핵심적인 공간으로, 해발 50 m인 산꼭대기에 위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축성 당시에는 둘레가 763 m에 달했으며, 모두 석축 성벽으로 쌓고 상부에는 담장(도베이)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출입구는 동쪽과 북쪽 두 곳에 내었다. 또한 내부에는 전투용 누각(야구라) 6개와 거주용 막사건물 2동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유사시 전투지휘소로 사용되는 천수각은 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2단 성벽>
일본 성곽에서는 출입구와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용 누각을 설치하는데, 울산왜성에서는 지형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석축을 2단으로 쌓고 그 위에 누각을 설치하였다.
<일본 구마모토성 모퉁이에 있는 전투용 누각>
2단성벽
본환의 동남 모퉁이에는 원지형의 경사가 급하고 지반의 형상이 불량함에도 불구하고 유사시 동측 출입구와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투용 누각(失藏, 야구라)를 시설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먼저 아랫단에 자연암반을 이용한 석축을 쌓아 기단부를 조성하고, 그 위에 높은 성벽을 쌓아 올렸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본성 출입문>
‘ㄱ’자 형태로 꺾여 들어간 일본 성곽 출입문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입문 위에는 아구라몬이라는 일본식 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마모토성 본성 출입문>
구마모토성은 울산왜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곽으로 울산왜성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환 출입구
본환에는 동쪽과 북쪽 두 곳에 출입구를 내었는데 동쪽의 것이 주출입구로 남쪽의 선착장과 연결된다. 출입구의 평면형태는 안으로 꺾여 들어간 ‘ㄱ’자 형태로 ‘마스가다 구구치(枡形虎口)’라고 부르며 당시 일본 성곽에서 가장 발달한 형식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외부에서 문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불안감을 주며, 이곳을 통과하는 공격자에게는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구조이다. 기록에 의하면 성문은 석축과 석축 사이에 누각 건물을 걸쳐 놓고 그 아래에 출입문을 설치한 이층문(櫓門, 야구라몬)으로, 2층 건물 벽면에 총구를 만들어 유사시 조총사격의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정상부>
태화강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곳은 조선후기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였다고 하며 요산대라고 불렀다.
<요산대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태화강과 주변 풍경>
멀리 동해바다까지 보이는 곳이다.
요산대(樂汕臺)
1917년 울산군이 발간한 『울산안내』에는 ‘울산의 이름난 선비인 김홍조가 증성(甑城, 울산왜성)의 정상부에 요산대라는 돌로된 비석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산(汕)’은 물고기 잡는 그물의 일종인 ‘오구’이지만, ‘물’과 ‘뫼’, 즉 태화강과 동천을 뜻하는 ‘이수(二水)’와 당시 삼산동에 솟아 있었던 ‘삼산(三山)’을 한데 묶어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요산대는 태화강과 동천, 그리고 삼산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넓은 터라는 뜻이다. 이 ‘산(汕)’은 조선후기 반구동에 살았던 선비 이문화의 서실인 오산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본성이 있던 정상부>
약간의 평탄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일본 성곽과는 달리 천수각을 쌓지는 않았다.
<본성 동쪽편 아래로 보이는 태화강>
본성 아래쪽 태화강변에는 토성 형태의 토축을 쌓고 해자를 둘렀다고 한다.
외곽부 토성
울산왜성의 주곽부 아래 평지에는 태화강과 면한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토루와 해자를 둘러서 외곽부를 중복적으로 구축하였다. 일본 성곽용어로 ‘소가마에’라고 부르는 이 외곽부는 기록상 전체 길이가 약 2.7 km에 이르렀다. 이것은 주곽부의 방어를 위한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병사들의 숙소나 식료창고 등의 건축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시작된 토지구획정리사업 이전까지만 해도 왜성의 동쪽 성벽에서 지금의 중앙여고 자리에 이르는 구간에는 긴 토성이 남아 있었으며, 주민들은 그 모양이 나팔과 닮았다 하여 ‘나팔등’으로 불렀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동쪽편>
경주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동천이 지나간다.
<본성 남쪽편>
경사가 심한 지형으로 방어에 용이하다.
<본성 서쪽 출입문>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동쪽 츨입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본성 서쪽 아래 산책로>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성 남쪽편 성벽>
<본성 서북쪽 3환>
본성 서북쪽에는 약간의 평탄한 지형이 있다. 이곳에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3환이라 불리는 외성을 별도로 쌓았다.
<3환이라 부르는 외성으로 오르는 길>
울산왜성
이 성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11월 초순부터 12월 하순경까지 왜군 2만 3천명이 동원되어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헐어다가 급하게 쌓은 일본식 성이다. 성곽 축조에는 여러 왜장이 참여하였는데 전체 설계는 가토 기요마사가 담당하였고, 축성공사는 오타 카즈요시의 감독아래 아사노 요시나가, 시시도 모토츠구, 기요마사의 부장들이 맡았다. 성은 여러겹의 소곽이 단을 이루며 구축된 형태로 석성으로 쌓은 주곽부와 토성으로 쌓은 외곽부로 구성하였다. 주곽부는 해발 50 m인 산꼭대기에 본환을 두고, 본환 북쪽 아래 해발 35 m 지점에 2지환을 배치하였다. 주곽부는 해발 50 m인 산꼭대기에 본환을 두고, 본환 북쪽 아래 해발 35 m 지점에 2지환을 배치하였으며, 그 아래 서북쪽 해발 25 m 지점에 3지환을 두었다.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400 m이고, 성벽의 높이는 10 ~15 m였다. 주곽부의 남쪽에는 군수물자 및 병력수송을 위해 항시 배를 댈수 있는 凹자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었다. 또한 주곽부 밖으로는 태화강에 면한 남쪽을 제외한 동, 북, 서쪽 3면에 2,700 m의 토루와 해자를 두르고 목책을 세워 외성을 구축하였으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남아있지 않다. 이 성은 그 후 우리 수군이 한동안 쓰면서 1624년(인조 2)에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으며, 성의 모양이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여 증성으로 불렸다. 울산왜성은 1935년 사적 제22호로 지정되었으나,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라는 점에서 국가 사적에서 해제되어 1997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울산왜성 서쪽 출입통로>
이곳에는 원래 출입문이 없었으며,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공원을 조성할 때 이곳에 출입통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울산왜성은 일제강점기에 김홍조라는 인물이 땅을 사들여 나무를 심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학성공원(鶴城公園)
울산 최초의 도심공원인 학성공원은 구한말 울산 출신의 선각자 김홍조 선생이 조성했다. 그는 이 곳을 공원으로 꾸며서 울산군에 기증할 목적으로 1913년 주변의 땅을 사들여 각종 나무와 꽃을 정성껏 심고 가꾸었다. 그러나 1922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927년 그의 아들 김택천에 의해 울산군에 기증됐다. 공원이 정식으로 개원한 것은 1928년 4월 15일 당시 공원 이름은 ‘울산공원’이었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7년)
<출처>
- 울산시청
- 문화재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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