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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태원전 일원,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경복궁 제일 뒷편으로 걸어들어가면 새로 복원한 궁궐 전각을 볼 수 있는데,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태원전이다. 구한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국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태원전을 지었다고 한다. 태원전은 평상시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곳이지만, 실제로는 국장이 있을때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실제로는 태안전을 세워진 후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한 기간은 많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왕실가족이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헐리는 건물이 되었다. 광복이후 건물이 남아 있지 않는 상태에서 청와대를 경호는 군부대가 이 곳에 주둔했었다가 최근에 복원하였다.

<경복궁 태원전 영역>

태원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건물이지만, 원래 목적은 조선 왕실에서 발생하는 국상을 위해서 세워졌다고 봐도 무방한 건물이다. 보통 국왕이 승하했을때 시신을 모신 관은 빈전에 안치하면서 국장절차가 시작되며 왕릉을 조성하고 발인할 때까지는 5개월이 소요된다. 그 이후에는 신주를 삼년상 기간동안에 혼전에서 모시는데, 그 장소가 경복궁에서는 태원전이 그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국장이라는 것이 대상은 왕과 왕비라서 많지 않은 것 같지만, 3년상을 치르기때문에 국장을 치르기 위해 궁궐 전각을 사용한 기간은 짧지 않았다. 경복궁이 없었던 조선후기에는 국장기간동안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하거나 창경궁, 경희궁에 있는 전각을 사용하였다. 3년에 이르는 국장기간동안 운영되는 관청들이 있었고 많은 업무공간이 필요해서 이궁(離宮)들을 활용했고,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런 목적으로 태원전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태원전(泰元殿)

경복궁 영역내 북서쪽에 위치한 태원전 전경. 어진을 모시는 사당의 성격과 빈전의 성격을 같이 갖는 건물이다. 정문인 건숙문(建肅門) 양쪽으로 많은 행각들이 들어서 있다. 국장기간동안 새로이 설치되는 도감을 설치되고 많은 인원이 참여하기때문에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건숙문은 외삼문의 성격과 궁궐 출입문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 사당건물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건숙문 안으로 보이는 마당>

<건숙문과 경안문 사이 마당>

이곳에는 행각이 들어서 있지 않다.

<내삼문인 경안문(景安文)>

<태원전으로 연결되는 복도각>

<옆에서 본 복도각>

<태원전>

경안문과 태원전 사이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빈전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과 비슷한 구조이다.태원전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일반적인 업무용도의 궁궐건물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평소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다가, 국장시 빈전의 역할을 했다.

<가운데 대청마루>

<태원전 현판>

<추녀마루 잡상들>

<뒤에서 본 모습>

<태원전 뒷편 숙문당>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사당과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로 보인다.

태원전 일원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 기간을 치룬 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문경전은 혼전으로 건립되었다. 주변에 공묵재, 영사재 등 상례용 건물들도 들어서 일곽을 이루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철거를 겪고 한때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이 일원의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출처:문화재청>

태원전 행각들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경우 국장의 사유가 발생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국장을 준비하는 임시관청인 도감을 설치하는 것이다. 도감에는 빈전을 유지관리하는 빈전도감, 국장행사를 주관하는 국장도감과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있으며, 국장기간인 3년동안 유지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많은 관헌들이 국장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공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원전에는 국왕이 거처하는 재실로는 영사재, 공묵재가 있고, 실문관헌들이나 궁녀 등이 머무는 크고 작은 행각들이 있다.  태원전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근무할 수 있는 상당히 칸수가 많은 행각들이 들어서 있다. 행각이 동쪽에 2동, 서쪽에 1동이 있고, 행각들은 2개의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실과는 달리 작은 방과 창고로만 이루어져 있다.

<태원전 행각들>

경복궁 태원전 일원에는 재실 성격을 갖는 영사재와 공목재를 비롯하여 임시관청 관헌들이 근무할 수 있는 많은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상주하는 인원이 없었던 건물인 까닭에 먼저 건물이 헐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사재>

<오른쪽에서 본 모습>

태원전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재실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국상 기간 중에 고종이 신하들을 알현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태원전을 비롯하여 많은 전각들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영사재 마당에 있는 행각>

<태원전 서쪽편 행각>

중심이 되는 큰 건물은 없이 행각으로만 되어 있다.

<행각 안마당>

<안쪽으로 이어진 행각>

<우물이 있는 마당>

태원전 동쪽으로는 국왕이 머물렀던 재실인 영사재, 공묵재를 비롯하여 4동의 행각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공묵재(恭默齋)>

<공묵재 출입문인 홍경문(紅景門)>

<마당에서 본 모습>

공묵재는 앞면 5칸의 궁궐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이다. 고종은 평상시에도 이곳 공목재에서 신하들을 알현했다고 한다.

<경사합>

공묵재 뒷편에는 경사합이라는 건물이 있다.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머무는 장소로 보인다. 동쪽편 행각들과는 협문을 통해 출입한다.

<경사합(敬思閤) 마당>

<경사합에서 태원전 마당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복도각>

태원전 행각과 동쪽편 행각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 행각>

태원전 동쪽편으로는 분리된 두 동의 행각 건물군이 있다. 남쪽 건물은 복도로 공묵재와 연결되어 있고, 북쪽 건물은 독립적으로 건물군이 형성되어 있다. 단순히 추론해 보면 남쪽건물은 영사재와 연결된 것으로 봐서 국왕을 모시는 내시나 궁녀들이 사용한 것 같다.

<남쪽 행각 출입문인 보강문(保康門)>

<남쪽 편 마당>

<북쪽편 마당>

행각은 2개의 마당으로 되어 있다. 행각은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는 크고 작은 방으로 구성되었다.

<북쪽 행각>

 북쪽 행각은 국장을 진행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기관에서 사용한 것 같다. 북쪽 행각도 2개의 마당으로 되어 있으며, 크고 작은 방들이 들어서 있다.

<북쪽편 마당>

<남쪽편 마당>

 태원전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이라는 강박관념에 눌려있던 고종이 생각해낸 계책으로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태원(太元)이란 명칭만 보더라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곳임을 알 수 있다. 고종이 태원전을 세운 데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심으로써 국왕의 정통성에 대해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내가 담겨 있다. 태원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후에는 제사와 관련된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으로도 쓰였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