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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한개마을 응와종택, 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터에 있는 고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응와종택이다. 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이었는데, 조선후기 후손인 이이신이 매입하였으며, 그의 아들이자 사도사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세자를 추모하여 북쪽으로 문을 내고 살았다고 하여 북비고택으로도 불렸다. 후손들이 여러차례 증축하여 대저택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쪽에 대문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형태이다. 안채는 아랫채, 행랑채 등과 함께 넓은 ‘ㅁ’자형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지역적인 특색이 반영된 공간배치를 하면서도 구한말 유행했던 건축양식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한개마을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나즈막한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마을앞 들판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응와종택>

한개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종택이 있던 곳에 위치한 응와종택이다. 구한말에 지은 솟을대문을 사용하고 있다.

<마굿간과 문간방이 있는 문간채>

<응와종택 사랑채>

저택은 바깥쪽에 사랑채가, 안쪽에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19세기에 유행한 누마루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사랑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 누마루(바깥쪽)>

<사랑채 누마루(안쪽)>

<북비 출입문>

사랑채 앞쪽으로는 사도세자 호위무사로 그를 추모하여 북쪽에 문을 내고 은거하면서 살았다는 옛 북비고택이 있다.

<북비채>

앞면 4칸의 작은 규모을 하고 있다. 마당 한쪽에 장판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공간을 분리해 주고 있는 행랑채>

<안채>

앞면 6칸의 ‘-‘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맞은편  중문채와 서쪽의 아랫채와 함께 넓은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안채와 행랑채만 남아 있다.

<중문채가 있던 자리>

안채 맞은편 중문채가 있던 자리는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성주 한개마을 전경>

성주 응와종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성주 응와종택은 한개마을 성산이씨의 발상지이다. 성산이씨가 한개에 입향할 당시의 종택이었던 대초당을 경종 1년(1721)에 처사 이이신이 매입하여 응와종택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이이신의 아들 돈재 이석문이 북쪽으로 문을 내어 북비고택으로도 불린다. 돈재의 아들 사미당 이민겸이 규모를 확장하였고, 사미당의 아들 농서 이규진이 순조 21년(1821)에 정침을 신축하였으며, 농서의 아들 응와 이원조가 현종 11년(1845)에 사랑채인 사미당을 낙성하여 현재의 규모를 이루었다. 고종 36년(1899)에 솟을대문을 증축하여 대감댁의 면모를 갖추었고, 순종 4년(1910)에 사당을 증축하였다. 돈재는 무신으로서 사도세자에게 충의를 다하였고, 농서는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은율현감을 지냈다. 응와는 한성판윤.공조판서.판의금부사를 지낸 문신이며, 조선 주리학의 학통선상에 있는 학자이다. 충절과 학문을 면면히 이어 온 이 가옥은 안채.사랑채.안사랑채.사당.북비채.대문채 등 6채로 구성되어 있고, 북비채에 있었던 장판각과 안대문채.아랫채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소실된 안대문채는 중문간채.방앗간.고방 등으로 이루어진 6칸으로 안채 맞은편 남쪽에 있었으며, 아랫채는 안채의 동쪽에 지금의 안사랑채와 마주 보며 있었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