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인 한개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조선중기에 성산이씨 씨족마을로 자리잡았으며 영조 때인 17세기 이후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나즈막한 동산인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큰 하천이 흐르고 있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하천 주변의 넓은 들판이 있어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마을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마을 서쪽편 높은 곳에 응와종택, 한주종택, 교리댁 등 큰 규모의 저택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극와고택 같은 분가한 후손들이 살았던 작은 규모의 집들은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택들을 작은 골목길 안쪽에 대문을 두고 사랑채가 바깥쪽에, 안채를 두며 담장과 중문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마을 외곽에는 제사준비와 후학양성을 위해 지어진 재실과 서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17세기 이후 번창했던 까닭에 큰 업적을 남긴 조상을 모시는 서원은 세워지지 않았다.
<성주 한개마을 입구>
조선후기 양반계층들이 모여 살았던 집성촌으로 뒷편 높은 곳에 종가집을 비롯하여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큰 규모의 저택들이 있고, 아래쪽에는 분가한 후손들이나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서쪽편으로 올라가는 길>
마을 입향조가 살았던 곳에 지은 응와종택을 비롯하여 큰 규모의 고택들이 있는 마을 서쪽편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뒷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다.
<마을 안쪽 서쪽편>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응와종택, 한주종택, 교리댁 등 규모가 상당히 큰 고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외곽>
마을 외곽에는 후학을 양성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재실 건물들이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뒷편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개마을 풍경>
<아래쪽에는 분가한 후손들이나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집들>
원래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70년대를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바뀐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뒷편 서쪽에 위치한 고택인 교리댁>
조선후기 영조 때 처음 지어졌으며 19세기에 사랑채 등을 다시 고쳐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교리댁 뒷편에 있는 응와종택>
마을 입향조인 이우가 처음 살았던 곳으로 조선후기 후손인 이이신이 매입하였으며, 그의 아들이자 사도사자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이 세자를 추모하여 북쪽으로 문을 내고 살았다고 하여 북비고택으로도 불렸다.
<응와종택 사랑채>
정자같은 누마루를 갖추고 있는 크고 화려한 건물로 19세기 유행한 건축양식들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응와종택 뒷편에 있는 월곡댁>
마을 제일 안쪽 높은 곳에 위치한 고택으로 20세기에 지어졌다.
<마을 중간쯤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
기와를 얹은 담장 사이로 형성된 넓은 골목길이 시골길 같지 않고 화려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골목길에 있는 대문 안으로 보이는 고택들>
<골목길>
골목길에는 2동의 한옥 대문채가 마주보고 있어 도시 골목길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서쪽편에 있는 고택인 하회댁>
정확한 건립연대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17세기에 창건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가옥의 배치는 ‘ㄷ’자형 평면의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에 ‘-‘자형 평면의 중문채가 튼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면서 안채 우측으로 독립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하회댁 뒷편에 있는 고택인 도동댁>
응화고택에서 분가한 후손이 19세기에 지은 고택이다.
<마을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큰 규모의 저택인 한주종택으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한주종택>
조선후기 영조 때 처음 지어졌으며 여러차레 중건을 거치면서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승희를 비롯하여 여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유서깊은 저택이다.
<한주종택 사랑채>
<마을 중간 도동댁 앞 골목길>
<분가한 후손이 살았던 작은 규모의 고택인 극와고택>
구한말인 1852년에 처음 건립된 고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남아 있다.
<극와고택에서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골목길 중간쯤 수리중인 고택>
<마을 공동우물>
<마을 아래쪽 큰길>
성주 한개마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6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개마을은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격조 높은 선비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민속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은 주산인 영취산(해발 331.7 m)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청룡등과 백호등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며, 마을 앞으로 이천과 백천이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남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전국 최고의 길지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이름인 한개는 순후 우리말로서 ‘한’은 크고 넓다(大)는 뜻이고 ‘개’는 큰 물이 드나드는 곳(浦)을 나타낸 방언으로, 백천에 제방을 쌓기 이전에 큰물이 졌다가 빠져나가면서 생겨난 큰 개울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은 조선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가 처음 입향하여 개척하였으며,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17세기 이후 과거합격자가 많이 나왔으며, 충절과 지조, 높은 학문, 독립운동 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마을에는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9채와 조상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6채의 재실을 포함한 75채의 집들이 있으며,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전통가옥이다. 또한 각 집을 둘러싸고 있는 적당한 곡선의 토석담장으로 된 옛 골목길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마을의 운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마을의 집들은 배치 및 평면이 지역적인 특성을 담고 있으며, 지붕.대청.부엌.툇마루 등이 거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의 가재도구와 의복, 생활용품 등 옛 생활의 흔적을 담은 유산들도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어 전통 민속문화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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