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은 왕권의 상징이자 정치의 중심인 정전을 궁궐 중심에 두고, 동쪽에는 차기 왕권을 상징하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을, 서쪽에는 국왕을 보필하는 관청인 궐내각사를, 뒷편에는 업무공간인 편전과 생활공간인 침전을 두고 있다. 동궁은 조선시대 법궁이었던 경복궁과 창덕궁에만 정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궁(離宮)이었던 창경궁과 경희궁에는 동궁을 별도로 배치하지 않고 당시 여건에 따라서 국왕의 거처로 마련했던 전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세자 부부의 생활공간인 자선당>
경복궁 동궁은 근정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궁은 일반 사대부저택처럼 세자부부가 거처하는 생활공간인 자선당 일대와 세자가 공부를 하거나 업무를 보는 공간인 비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현각 앞에는 세자 교육을 전담하는 관청인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업무를 수행하는 세자익위사(계방) 등의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궁은 조선초 경복궁 창건시에는 없었으며, 세종대인 1427년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다시 세워졌으며 순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동궁 영역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자선당은 일본으로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불타버렸다가 기단석만 1995년에 반환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자선당과 비현각만 1999년 복원하였다.
<근정전 동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동궁>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것을 1999년에 복원하였다. 동쪽편에 세자의 업무공간에 해당하는 비현각이, 서쪽에 세자부부의 생활공간인 자선당이 자리잡고 있다. 국왕의 후계자인 세자 부부를 수행하는 인원이 많았던 까닭에 많은 행각들을 두고 있다. 세자교육을 담당했던 세자시강원과 경호업무를 담당했던 세자익위사 건물들을 비롯한 많은 부속행각들은 복원되지 않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이극문(貳極門)>
<동궁 동쪽 행각과 출입문>
동궁권역은 출입문은 여러 곳에 있는데, 정문은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국왕이 드나드는 문이 삼문(三問)으로 되어 있다만, 동궁으니 2개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에는 이극문(貳極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극(貳極)은 왕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남쪽 출입문>
정면에는 작은 협문이 자선당과 비현각 앞에 있다. 실무자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보인다.
<이극문 안쪽 마당>
이극문을 들어서면 비선당과 비현각 앞으로 마당이 근정전까지 연결되어 있다. 문간채 성격의 행각들을 두고 있지 않다.
<근정전과 편전 영역을 출입하는 문>
<근정전과 동궁 사이 마당>
자선당(資善堂), 세자 부부의 생활공간
경복궁 사정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어 동궁으로 불리는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9년에 복원하였다. 동궁은 국왕이 아닌 까닭에 전(殿)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니라 당(堂)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자선당은 앞면7칸의 건물로 서쪽에 세자와 세자비의 침실인 2칸의 방이 있고, 동쪽에 가구들과 물건을 보관하던 곳으로 보이는 2칸의 방이 있다. 동궁은 규모가 크지 않고 소박한 분위기를 하고 있으며, 자선당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하고 있다.
<세자부부의 생활공간인 자선당 영역>
<자선당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중광문>
세자부부의 거처인 자선당을 출입하는 정문인 ‘중광문(重光門)’이다. 동궁 정문에 해당하는 이극문과 마찬가지로 2개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자선당 문간채에 해당하는 공간>
<수행원들이 기거하는 방>
세자부부를 수행하는 인원들을을 위한 행각들이 들어서 있다. 행각은 온돌방, 마루방,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에 해당하는 진화문(震化門)>
<자선당>
세자부부가 거처하면서 생활하는 공간인 자선당이다.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왼쪽편 온돌방>
<뒷편 공간>
뒷편에는 물건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돌방 앞에는 복도가 있다.
<침실로 사용하는 오른쪽 온돌방>
<자선당 추녀마루 잡상>
<자선당 앞 마당>
<행각>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건청궁 뒷마당에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훼손된 옛 자선당 기단석을 볼 수 있다.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자선당은 왕세자 및 세자비의 거처로서, 자선(資善)은 ‘어진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자선당은 세종 9년(1427) 근정전의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에 중건되었다.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1916년 자선당을 동경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 ‘조선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1993년 당시 문화재전문위원 김정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에 국내로 들여왔으나,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동궁 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재사용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출처:문화재청>
비현각(丕顯閣), 세자의 집무공간
비현각은 세자가 일상업무를 보던 곳으로 일반사대부 저택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세종때 세자였던 문종의 업무공간으로 건립한 공간이다. 앞면 6칸의 독립된 건물로 가운데에 3칸은 대청마루, 동쪽 1칸, 서쪽 2칸 온돌방을 두고 있다. 자선당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두는 반면 비현각에는 추녀마루를 두고 있지 않다. 비현각은 행각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세자의 교육업무를 맡은 춘방과 경호를 맡은 계방이 비현각 앞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세자가 국왕이 되기까지는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 교육을 위해 춘방이라고 불리었던 세자시강원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었다. 세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특별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국왕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아야만 했기때문에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비현각 정문에 해당하는 이모문(貽謀門)>
<비현각 문간채에 해당하는 공간>
이모문을 들어서면 문간채에 해당하는 수행원들을 위한 행각들이 있다.
<동쪽 구현문>
<비현각>
비현각(丕顯閣)은 세자의 업무공간이자 교육을 받던 장소로 앞면 6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앞뒤로 분합문을 달아 여름에는 정자처럼 사용할 수 있다. 세자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과 함께 경연(經筵)이 열렸을 것이다.
<바깥쪽 온돌방>
<안쪽방>
온돌방은 겨울에 사용했던 공간이다.세자가 공부하던 서재를 재현해 놓고 있다.
<대청마루 오른쪽 1칸짜리 온돌
왼쪽편 방에는 가구들을 비치해 놓고 있다. 책이나 문구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 앞에 걸어놓은 분합문>
<비현각 출입문과 행각>
동궁일원
왕세자는 떠오르는 해와 같아서 세자궁을 동쪽에 세워 동궁(東宮)이라 부른다. 자선당(資善堂)은 세자가 거처하던 곳이며, 비현각(丕顯閣)은 공부를 하며 정무를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남쪽의 춘방(春坊) 터에는 세자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이, 계방(桂坊) 터에는 경호와 의전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은 크게 훼손되어 자선당은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지진으로 불타 버렸고, 기단석만 반환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99년에 복원된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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