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현(昌寧縣)은 조선시대 창녕읍과 주변지역에 설치되었던 지방행정 조직이다. 삼국시대 비화가야의 중심지역으로 당시 지배층의 무덤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으며 고려때까지는 창녕군이 유지되다가 조선 태종 때 종6품 현감이 고을 수령인 창녕현으로 강등되었다. 옛 창녕현 관아 건물로는 객사가 있으며, 관아에서 운영했던 석빙고(보물), 창녕 현감을 지냈던 인물들을 위해 세원 송덕비, 구함말에 세원 척화비 등이 남아 있다.
창녕현 관아 중심 건물이었던 객사는 만옥정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시장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다가 1988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좌.우 익사는 없어지고 정청 건물만 남아 있다. 건물 벽면이나 창호, 마루도 없어, 누각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시장으로 옮기면서 그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창녕 객사>
시장 건물로 사용하다가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좌.우 익랑은 남아 있지 않은 정청 건물이다. 지붕과 기둥만 남아 있다. 건물을 앞면 3칸 규모로 객사 건물는 비교적 큰 편이다.
<옆쪽에서 본 모습>
<뒷쪽에서 본 모습>
<객사가 있는 창녕 만옥정 공원>
<송덕비 등>
공원 한쪽에는 창녕 현감을 역임한 인물들을 위해 세원 송덕비 등을 모아 놓았다. 다른 고을에 비해 송덕비가 많은 편이다.
<공원 한쪽편에 있는 척화비>
<창녕 석빙고(보물)>
창녕읍 도심 송현리에 있는 창녕 석빙고(보물)이다. 관아에서 운영했던 얼음창고 이다.
창녕 객사,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객사는 외부의 관원이나 외국 사신이 묶는 숙소이자, 임금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객사는 왕실의 권위를 반영하는 중요 지방 공공시설의 하나였다. 창녕현 관아의 부속 건물이었던 이곳 객사는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300~400년 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 시대 때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구실로 객사를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보수하였다. 객사의 전형적인 건물 배치는 종묘의 건물을 모델로 하였기 때문에 중앙에 주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있는 구조이다. 주 건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에는 벽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 구조만 남아 있고, 또 좌우의 익사도 없어서 원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지붕도 일반적인 객사에 비해 매우 낮고 건물의 방위조차 원형과 달라 권위 있던 객사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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