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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태백산 부석사, 통일신라 화엄십찰을 대표하는 사찰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있는 부석사(浮石寺)이다. 백두대간 태백산 끝자락 봉황산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이 통일되던 676년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일신라 주류였던 화엄십찰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부석사가 있는 풍기 지역은 깊은 산중도 아니면서 산물이 풍부하고 죽령을 오가는 주요 교통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오랫동안 사찰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는 봉황산 중턱에 거대한 돌로 석축을 쌓아서 터를 조성하였으며 그 위에 건물들을 올려 놓았다. 주불전인 무량수전과 그 앞 안양루에 올라서면 아래에서 보이는 편안한 모습은 풍경과는 달리 상당히 웅장하면서도 날아갈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무량수전(국보)와 조사당(국보)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이다. 통일신라 때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와는 달리 무량수전 동쪽편 언덕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며, 무량수전에 모셔진 불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가장 오래된 불전 벽화(국보)가 있었다. 부석사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수덕사, 봉정사 등 오래된 국보급 불전 건물이 있는 사찰들과 비슷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

부석사는 백두대간 태백산 자락인 봉황산(818 m)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무량수전이 있는 사찰 중심 영역은 거대한 돌로 석축을 쌓아 조성했으며, 그 앞에 안양루라는 누각을 세워 놓았다. 마치 봉황이 날아오르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부석사 가람배치>

들어가는 길

부석사는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지만 들어가는 길은 평판한 편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걸어가는 호젓한 길은 가을 은행나무의 노란색과 더불어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겨주고 있다. 길 양쪽에 있는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 과수원의 사과와 함께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게 해 준다. 봄에는 활짝핀 사과꽃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상당히 아름다운 길이다.

<부석사 주차장에서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길>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황산 자락에 있지만 태백산의 한 줄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 들어가는 은행나무길>

<초겨울 모습>

당간지주(보물)는 은행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깃발을 다는 장대를 지탱해 주는 높이 428 m의 돌기둥이 1 m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외형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간결하면서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멀리 보이는 천왕문>

<천왕문이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쌓은 석축>

안양루 아래 공간

부석사는 천왕문에서 시작해서 9단(혹은 10단)으로 석축을 쌓아 가람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는 사찰 가람배치에 불교 사상을 구현하기 위함이라 한다. 삼층석탑과 종무소가 있는 공간을 오르는 3단계 석축이 있고, 범종루을 오르는 3단계 석축, 안양루를 오르는 3단계 석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뛰어난 불국사 석축과는 달리 자연석을 쌓아서 만든 석축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웅장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공간에는 불전을 두지 않고 승려들이 수행하는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부석사 2번째 출입문인 회전문>

<회전 옆 석축과 요사채 건물>

회전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범종루는 3번째 축대를 쌓은 공간으로 오르는 출입문 역할을 한다. 범종루가 가람배치에 있어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회전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범종루 아래 공간에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인근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층석탑>

<삼층석탑 뒷편 종무소>

범종루는 부석사에는 뛰어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위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누각 형태의 큰 건물로 ‘봉황산부석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범종루는 입구쪽은 팔작지붕을, 반대편으로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옆면 4칸으로 누각 건물 중에는 크고 웅장한 규모이다.

<범종루>

<안쪽에서 본 범종루.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범종루 내부에는 법고(북) 등이 있으나 범종은 없다. 내부는 상당히 넓은 편이며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범종루 내부>

<서쪽편에 있는 범종각>

<범종각 위쪽 요사채인 선열당>

<맞은편에 있는 응향각>

<윗쪽에 있는 장경각>

<삼성각>

<지장전>

무량수전이 있는 중심영역

부석사의 중심 영역은 10번째 축대로 조성된 영역으로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 주불전을 자리잡고 있다. 그 앞에는 석등이 놓여 있으며, 삼층석탑은 동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누각 건물인 안양루가 자리잡고 있다. 안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백두대간 산자락이 이어지는 풍경은 손곱히는 명장면 중의 하나이다. 무량수전은 고려말에 지어진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배흘림 기둥 등 주심포계 목조건축물을 가장 잘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량수전 뒷편에는 창건 설화가 얽혀 있는 부석바위가 있다.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

안양루(보물)는 주불전 영역을 출입하는 출입문이자 강당 역할을 하는 누각 건물이다. 안양루는 축대 아래에서 보면 웅장해 보이지만, 무량수전에서 보면 아담하며,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부석사 안양루(보물)>

무량수정 앞에 있는 안양루는 앞면 3칸의 크지 않은 누각건물로 축대 아래에서 보면 웅장해 보이지만, 무량수정 앞 마당에서는 아담해 보인다.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부석사 안양루(보물)>

<무랑수전이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는 축대>

안양루를 지나면 부석사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무량수전(국보)와 석등(국보)를 볼 수 있다. 부석사를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석등은 높이 2.97 m 이며 통일신라 석등의 표준이 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8각형 평면의 기둥처럼 만든 기단 위에 화사석을 올려 놓았다. 석등은  각부분의 비례에서 주는 조형미나 세부적인 조각수법 등이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와 석등(국보)>

무량수전(국보)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손꼽힌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식 공포를 하고 있다.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불상이 동향을 하고 있어, 앞면으로 보이는 부분은 사실상 옆면이다. 고려시대에 지은 건축물로 주심포계 공포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단아한 조형미를 주고 있다.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는 지붕은 처마를 넓게 하여 웅장하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은 중국식으로 적혀있다.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공민왕은 원나라에 자란 사람으로써 원나라 양식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 현판>

<지붕을 받치는 주심포양식의 공포와 안정감 있게 보이는 배흘림기둥>

소조여래좌상(국보)은 높이 2.78m의 소조불상으로 주불전인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처럼 보이지만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고,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마타여래를 표현한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소조불상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 규모도 가장 크다.


<무량수전에 모셔진 소조여래좌상(국보)>

무량수전 뒷편에 있는 부석바위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설화가 전해오는 바위이다.

<부석바위>

부석(浮石)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 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리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안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범종루와 주변 공간, 그 너머로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간 작은 봉우리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안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부석사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해가 넘어가는 일몰장면>

무량수전 동쪽편에 세워진 삼층석탑(보물)은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던 경주의 쌍탑식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고, 불전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형미는 양호한 편이고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석탑이다.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삼층석탑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무량수전>

조사당을 비롯한 불전과 전각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 초상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불전인 조사당(국보)은 무량수전 동쪽 삼층석탑을 지나 숲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볼 수 있다. 조사당 바로 앞에는 의상대사 지팡이를 꽂은 곳에 핀 꼿인 어사화가 있으며, 동쪽편에는 사명대사가 수도했던 곳으로 유명한 취현암이 자리잡고 있다. 조사당을 지나면 응진전, 자인당과 함께 조그만 단하각이 자리잡고 있다. 삼성각은 무량수전 서쪽편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장전은 범종루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앞 마당>

조사당(국보)은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말에 지어진 불전이다. 건물은 앞면3칸, 옆면1칸의 작은 건물로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조사당 내부에는 고려시대 대표적 회화작품인 조사당 벽화(국보)가 있었다.

<부석사 조사당(국보)>

<조사당 내부>

<조사당 벽화(국보)>

<조사당 옆 사명대사가 머물렀다는 작은 암자>

웅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불전으로 보통 사찰의 경우 대웅전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부석사 웅진전은 무량수전 뒷쪽편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자인당은 원래 스님들의 선방으로 사용했던 건물인데 인근 사찰터에서 옮겨온 삼존여래 좌상을 모시고 있다.

<응진전과 자인당>

<응진전 내부>

지인당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이다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들로 장식적인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인당 내부>

<응진전 뒷편 작은 불전인 단하각>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이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로 불리우게 됨은 무량수전 서쪽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어있지 않고 떠 있어서 ‘뜬 돌’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혹은 홍교사라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 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부석사는 무량수전 등이 크게 중창되었으나 공민왕 7년(1358) 외적의 병화를 당하였고, 그 후로 우왕 2년(1376)에 무량수전이 재건되었고, 우왕 3년(1377)에는 조사당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220호, 1636호), 삼층석탑(보물 249호), 당간지주(보물 255호), 대석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18호), 조사당(국보 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45호), 조사당벽화(국보 46호), 고려목판(보물 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출처>

  1.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