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조계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사(松廣寺, 사적)이다.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와 함께 3대사찰로 여겨지며 수행을 중시하는 승보사찰로 불리우고 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길상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었는데,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불교개혁 운동인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송광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유서깊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이나 불상같은 조형미가 뛰어난 불교 예술품들은 많지 않은 반면,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국사전을 비롯하여 고려 이후 불교 관련 유물들을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송광사는 크고 작은 불전들이 불전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규모가 크거나 유서깊은 내력을 가진 불전은 많지 않다. 반면에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인 승방이나 요사채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를 대표하는 국사전(국보)도 원래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었으며, 고려말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는 하사당(보물) 또한 승려들이 수행했던 공간이다. 전성기 때 송광사에는 많은 승방들과 사찰 관련 일을 보던 사람들이 살던 건물들로 아주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많은 전각들은 1842년의 화재와 한국전쟁 등으로 많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여러차례 중창을 통해 옛규모를 찾아가고 있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사적)>
송광사는 조계산 계곡 내 비교적 평탄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대웅전을 비롯한 부처님을 모신 불전이 있으며 그 주위로 수행공간들이 고루 배치되어 있다.
<송광사 가람배치>
남향을 하고 있지만 축대를 쌓아 공간을 조성하여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사찰 가람배치와는 달리 동.서로 흘러내리는 계곡을 중심으로 전각을 배치하여 편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주고 있다. 입지조건이나 가람배치 등에 있어 수행중심 공간으로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송광사지도>
19세기 전반에 그려진 이 지도는 <송광사사적>에 실려있는 가람배치도이다. 조선후기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광사 뒷편 언덕에 있는 보조국사 감로탑>
고려중기 불교개혁 운동을 이끈 보조국사 지눌의 승탑이다. 조형미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불교역사에서 차지하는 지눌의 승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제1세 보조국사 지눌(1158 ~ 1210) 영정>
국사는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성은 정씨고, 자호는 목우자이다. 8세 때 종휘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길상사에서 정혜결사 운동을 하며 불교계의 중흥을 이끌었고, 산 이름을 조계산, 절 이름을 수선사로 고쳤다. 진영 상단에 ‘원력수행해동불일보조국사’라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원력수생, 즉 대승보살행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하단의 화기를 통해 1780년 16국사의 진영을 완성하여 영당에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국사의 탑은 송광사 관음전 뒤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송광사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 깊은 고찰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송광산 길상사라고 하였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의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으로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16분의 국사가 주석했던 선종사찰로,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사찰로 여겨지고 있다. 그 동안 정유재란 및 임인년(헌종 8년, 1842년)의 대화재,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 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 하사당(보물 263호) 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 등을 비롯해 총 8천여점의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들어가는 길
송광사는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진 숲길을 걸어서 들어 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은 수목이 우거지고, 옆으로는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고즈넉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주는 길로 사찰 들어가는 길 중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길이다. 일주문은 사찰을 출입하는 통로인 삼청교 앞에 세워져 있으며, 사찰 앞을 흐르는 개울이 송광사와 속세와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울 바깥쪽에는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 공간인 세월각과 척주당이 배치되어 있다.
<송광사 입구 매표소>
<송광사 들어가는 길>
계곡을 따라 10여분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울창한 숲과 계곡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송광사 계곡>
<송광사 경내 입구>
멀리 첫번째 출입문인 일주문이 보이고, 주변에 당간지주,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송광사 조계문>
일주문은 보통 매표소 부근에 위치있는데 송광사에서는 천왕문을 들어가기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사찰 일주문 중에서는 꽤 오래된 편이다. 양쪽에 담장이 있는 것도 특이하다.
<세월각과 척주당>
조계문 안쪽에 있는 작은 사당 형태의 건물인 세월각과 척주당은 토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사찰영역 바깥쪽이라 할 수 있는 계곡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세월각.척주당, 19세기초
일주문 안쪽에 죽은 자의 위패를 두고 그 영혼이 속세의 때를 벗는 관욕처(관욕: 불교에서 재를 올릴 때 영혼을 정화하는 일)로 세월각과 척주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혼백을 목욕시켰으며, 세월각은 여자 영가, 척주당은 남자 영가의 관욕처로 사용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작은 건물이다. 두 건물의 내부는 비어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삼청교와 우화각 주변
송광사에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천왕문 앞 홍예가 설치된 다리인 삼청교 주변일 것이다. 삼청교는 홍예 형태로 쌓은 돌다리로 건축수법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주위 건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삼청교를 건너면 사찰 출입문인 천왕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요사채인 임경당이, 오른쪽에는 강당건물인 사자루가 배치되어 있다. 두 건물 모두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송광사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히는 삼청교 주변>
사찰이라기 보다는 선비들이 경치좋은 곳에 세워 풍류를 즐겼던 정자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돌다리 위에 지붕이 있는 건물을 올려 정자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사찰 경내 출입문인 천왕문 앞 개울에 세워진 돌다리>
<돌다리 위에 세워진 건물인 우화각 내부>
<강당인 사자루>
삼청교 위쪽으로는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강당 건물인 사자루가 있다. 강당은 대웅전 앞에 문루 형태로 세우는 것이 보통인데, 송광사에서는 천왕문 오른편에 강당을 배치하고 있다.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계곡 옆에 기둥 세우고 건물을 올렸다.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안쪽에서 본 사자루>
<삼청교 아래쪽에 위치한 요사채인 임경당>
계곡으로 돌출된 누마루를 두고 있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건물이다. 선비들이 즐기던 정자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로 이곳을 찾은 고위 인사들의 숙소로 지어진 건물로 여겨진다.
<경내를 출입하는 천왕문>
내부에는 소조사천왕상(보물)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복장유물(보물)가 발견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불전들
송광사는 고려중기 이후 수행도량으로 한국 불교를 이끌어온 사찰이다. 그러나 사찰의 명성이나 내력, 규모 등에 비해 불전의 규모는 크지 않은편이며 오래된 내력을 보여주지도 않고 있다. 대웅전 앞 작은 불전인 약사전(보물), 영산전(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최근에 중창되었으며, 그 규모 또한 크지 않은 편이다. 불전들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승보전과 지장전, 앞쪽에 약사전과 영산전, 뒷편에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불전의 공간배치에 있어 규칙성은 거의 없는 편이며, 당시의 필요에 따라 불전들이 자연스럽게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범종각>
대웅전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서는 문루형태의 출입문인 범종각이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공간배치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송광사 주불전인 대웅보전>
최근에 크게 중창한 불전으로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평지보다 약간 높게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웅장함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수행사찰로서 특징을 잘 보여주는 형태이다.
<대웅전 왼쪽 승보전>
원래 대웅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현재의 대웅전을 크게 중창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나한, 비구 등을 모시는 불전으로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불전이다. 나한전과 비슷한 성격의 불전으로 볼 수 있다.
송광사 승보전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에는 부처님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부처님과 10대제가, 16나한을 비롯한1250몀의 스님을 모신 전각이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대웅전을 송광사 7차 중창 당시에 복원하면서 지어졌으나 송광사 8차중창때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한 지장전>
<대웅전 마당 한쪽 약사전(보물)과 영산전(보물)>
공간을 분리하는 담장은 없지만 대웅전 영역과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송광사 약사전(보물)>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씩으로 현존하는 불전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건물 형태 등으로 볼 때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광사 영산전(보물)>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와 영산대회 그림(보물)를 모시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중기 인조 때(1639년)에 지어졌으며 그후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송광사 관음전>
구한말 왕실 기도처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한말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다.
송광사 관음전
관음전은 본래 성수전(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린 황실 기도처로 건축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세음 보살님을 옮겨 모시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세음보살 좌우에 그려진 태양과 달이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고 있고 내부 벽화에 문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불단을 향해 서 있다. 또한 내외벽에는 화조도, 산수화 등이 그려져 일반 사찰의 벽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송광사 관음전의 특징이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국사전을 비롯한 수행공간
송광사는 수행도량이라는 사찰의 성격에 걸맞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크고 작은 요사채 건물들을 두고 있다. 대웅전 뒷편 언덕에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국사전(국보 56호)를 중심으로 하사당(보물 263호), 상사당, 응진당, 시자실, 설법전 등 유서깊은 요사채 건물들이 모여 있는데 이 공간은 담장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수행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웅전 서쪽으로 대지전, 중현당,도성당,응향각,응현당 등 많은 요사채 건물들이 있으며 사찰 바깥으로도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송광사 수행공간>
송광사 대웅전 뒷편 언덕에는 국사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요사채들이 모여 수행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국보)>
고려말 승방으로 지어진 건물로 지금은 고승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계인데, 고려말 주심포에서 익공형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뒷편으로 보이는 설법전>
<하사당(보물)>
국사당과 함께 승보사찰로서 송광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건물인 하사당(보물)이다. 송광사의 많은 요사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븡을 하고 있는데, 부엌 위에 환기구를 두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국사당과 함께 조선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승려들이 수행했던 공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대웅전 뒷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수행공간>
하사당, 상사당, 응진당, 시자실, 설법전, 수선사 등 승려들이 수행하는 크고 작은 승방 건물들이 모여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하사당 뒷편 우물>
<지장전 뒷편 수행공간을 들어가는 출입문>
<지장전 뒷편에 있는 요사채인 해청당>
<영산전 앞쪽에 모여 있는 요사채들>
정혜사를 비롯하여 여러동의 요사채들이 모여 있다. 강당인 사자루와 함께 송광사를 찾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약사전 앞 마당에 있는 2칸짜리 작은 요사채 건물>
<승보전 뒷편에 모여 있는 요사채들>
국제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라 한다.
<바깥쪽에 있는 큰 규모의 요사채>
<송광사의 명소 중 한곳인 해우소 건물>
<송광사 비사리구시>
송광사에 많은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인 비사리구시이다. 사찰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찾은 손님들을 위해 밥을 담아두는 곳이다. 약 4천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비사리구시
송광사 비사리구시는 1724년 남원에서 태풍에 쓰러진 싸리나무를 옮겨와 만들어 졌다고 하나 사실은 보성군 문덕면 내동리 후곡(너문골) 봉갑사 인근 마을의 느티나무(귀목)이다. 그 쓰임새는 국가 제사시에 대중을 위해 밥을 담아 두는 것으로, 쌀 7 가마(4천명 분)의 밥이 들어간다고 한다. 송광사 이외에도 비슷한 용도를 지닌 구시가 있으나 많은 사찰들에서는 종이를 만드는 일에 지통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상광사의 경우에는 여러 근거로 지통이 아니라 밥통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송광사 3대 명물로 비사리구시, 능견난사, 쌍향수가 있다. (안내문, 순천 송광사, 2018년)
<출처>
-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 한국민족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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