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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고려실1] 후삼국의 통일과 문벌귀족시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고구려 옛 땅을 향한 북진정책과 발해 유민을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통합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한편 중국의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신분상승의 길을 넓혀 지식인계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농민들의 세금부담을 완화함으로써 통일신라에 비해서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려초기 동아시아는 중국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왕조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북방의 거란(요), 여진(금)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질서속에서 천자국을 자처하면서 실리적인 외교정책과 단호한 군사적 대응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켜냈다.

고려는 정치와 일반행정은 물론 전쟁을 이끄는 최고 지휘관까지 문신들이 이끌었던 관료중심의 사회였다. 고려의 관료체제가 성숙되면서 고위 관료를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12세기 고려청자로 대표되는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한편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등으로 문벌체제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균열이 생기면서 무신정변의 발발로 국왕과 문신 중심의 정치체제는 무너지게 되었다.

북관유적도첩 중 척경입비도, 조선 17~18세기, 화가 미상,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후기에 제작된 『북관유적도첩 北關遺籍圖帖』에 들어 있는 「척경입비도 坧境立碑圖」이다. 이 그림은 고려 예종 2년(1107)에 윤관(?~1111)과 오연총(1055~1116)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길주.공험진 등 9성을 쌓고 선춘령에 “고려지경 高麗地境”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통일신라 말기는 계속된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였으며, 중앙정부 통제력의 약화로 지방에는 다양한 호족세력이 등장한 시절이었다. 고려가 건국하기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이 시기에 속하지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에는 많은 사실들이 적혀 있으나, 유물로는 딱히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대산사길상탑지.

전몰 승려들을 위로하는 탑의 기록으로 오대산사 길상탑을 위한 것이었으나,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되었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인 진성여왕 대에 전쟁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모습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오대산길상탑지」에 기록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상
기유년(진성여왕3년, 889)에서 을묘년(진성여왕9년,895)까지 7년 동안,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럽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니,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행동이 짐승과 같았으며, 나라는 기울어질 듯하고 재앙이 절에까지 이르렀다. 나라와 삼보를 지키려는 바람은 승속과 같은데 칼날이 숲속에 난무하고 몸은 바윗등에서 잃었구나. <출처:중앙박물관>

전몰 승려들을 위로하는 탑의 기록, 오대산사 길상탑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진성여왕9년(895), 승훈지음, 석희 씀.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되었던 탑지 4매 중 하나로, 원래는 오대산사의 길상탑을 위한 것이다. 탑지 4매는 각각 해인다, 운양대, 백성산사, 오대산사를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해인사 묘길상탑에 함께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대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상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도 승군을 애도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해인사 묘길상탑.

 

후백제의 연호가 새겨진 승탑의 탁본, 후백제 견훤왕 19년(910)

남원 실상사에 있는 편운화상부도 명문의 탁본으로 “정개 10년 경오년(910)에 (부도룰) 세운다.”라는 내용이다. “정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 왕 견훤 때의 연호로 보인다. 명문에 따르면 편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의 개조 홍척의 제자라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 후백제 견훤왕 9년(900),

1980년 전북 전주 동고산성 출토, 후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수막새이다. 회갈색 경질 막새로, 둘레에 구슬무늬를 두르고 그 안쪽으로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에 “전주성全州城”이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수키와 부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고 막새 부분도 많이 닳았다. <출처:중앙박물관>

견훤과 후백제
견훤은 상주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뒤에 신라의 장교가 되어 출세하였으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반란군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차지한 견훤은 이어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하고 백제의 부흥을 내걸며 후백제를 세웠다(900).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차령산맥 이남을 차지하고 신라의 수도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는 등 매우 강성하였으나,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930)에서 그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얻은 왕건에게 패배한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견훤이 맏아들 신검에 유폐당하는 등 내분에 시달리던 후백제는, 탈출한 견훤이 고려 왕건에 투항하고 신검의 군대가 일리천(지금의 구미시 낙동강 지류)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배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936). <출처:중앙박물관>

궁예와 후고구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한때 승려로 지냈으나, 세상이 혼란해지자 양길의 부하로 들어가 원주.영월.강릉과 황해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자신의 무리를 이끌며 세력을 키우던 궁예는 양길을 몰아내고 송악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이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904), 태봉(911)으로 고쳤다. 궁예는 반신라 성향을 가진 옛 고구려 지역 주민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한때 그 세력의 판도가 대동강에서 상주.공주 등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민생을 위한 효과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미륵불을 자처하며 불교계와 신하들의 신망까지 잃음으로써 마침내 신하인 왕건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918). <출처:중앙박물관>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비해 다소 열세였으나, 태조 왕건이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을 우대하고, 혼인정책 등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점차 형세를 역전시켜갔다. 특히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크게 완화한 것은 통일신라의 고대적 수취에 반발했던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데에 크게 이여하였다. 고려가 신라의 자진 항복(935)을 받아내며 후백제를 제치고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었던 것은 이처럼 신라의 고대적 골품체제에 저항한 광범위한 사회구성원의 지지를 이끌어낸 태조의 안목과 경륜에 힘입은 바 크다. 역사상 두번째의 통일국가인 고려는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을 사실상 없애고, 거란에 망한 발해(926)의 유민들을 널리 포섭하는 한편, 북진정책을 통해 통일신라의 영역을 넘어 옛 고구려 영토를 조금이나마 회복해감으로써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통일 국가의 면보를 갖추어갔다. <출처:중앙박물관>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는 고려 태조, 고려 충렬왕 33년(1307),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을 때 담무갈보살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태조가 담무갈보살을 친견한 후 정양사正陽寺를 세웠다는 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담무갈보살은 화엄경의 12,000부처 중 가장 중심 되는 부처로, 항상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나무판에 흑칠을 하고 화면을 위아래로 나누어 각각 담무갈보살과 지장보살이 현신한 장면을 금선으로 그렸다. 이면에는 아미타구존도를 그렸다. 금강산 그림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씨 족보에 실린 고려 태조의 초상화, 사진영인, 일제강점기 1918년,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개성왕씨족보』에 실린 고려 태조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본래 대한제국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호족의 시대와 후삼국 통일
9세기 통일신라에서는 극심한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지방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새로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군진세력, 낙향한 왕실 귀족, 해상무역 세력 등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은 무거운 세금에 반발한 농민군을 이끌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중에서 특히 큰 세력은 나라를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그러하다.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이미 쇠락한 통일신라와 더불어 이른바 후삼국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은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세운 고려였다. 송악 지방 호족 출신인 왕건은 백성들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고, 크고 작은 호족들과 승려, 유교 지식인들을 적극 포용함으로써 민족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가 살았던 시기는 몽골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북방 민족의 요.금과 중국 민족의 송, 그리고 서역의 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으며, 서로 견제 및 협력관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고려왕은 형식상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에 따라서 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천자라 칭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유적 또는 유물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고려 역사를 대표하는 유물 또는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초에 역사에 대한 세탁이 한번 있었던 관계로 그런 현상이 생긴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박물관에는 고려 왕에 대한 대표적인 유물로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인종이 시호諡號를 올리며 지은글, 인종 시책, 고려 인종 24년(1146), 인종 장릉 출토,

시책에 기록된 인종의 업적,
고려 19대 왕 인종(재위 1122~1146)의 시호와 생전의 업적 등을 돌에 새겨 무덤에 넣은 시책이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일, 원구에서 제사지낸 일 등의 업적과 인품을 서술하고 시호와 묘호廟號를 기록하였다. 실제로는 당대의 문장가가 지었을 것이나 형식은 아들인 의종이 지어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 돌의 옆면 위아래에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어서 금실 같은 끈을 넣어 연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끈은 전하지 않는다. 원래는 글씨와 무늬를 새긴 곳에 금칠을 하고 신장상 일부에 진사를 사용하여 상당히 화려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종의 무덤에 넣은 함(函), 고려 인종 24년(1146), 인종 장릉 출토,

마름꽃 모양의 내함과 마름모 모양의 외함이 한 조를 이룬다. 내함은 청동으로 만들고 주석으로 도금하였으며, 외함은 이암으로 만들었는데 표면에 진사 등의 성분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원래 무늬를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함은 정확한 용도를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 유적에서 발견된 뼈항아리를 넣은 석제 외함과 비교하여 용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왕실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종의 무덤에 넣은 은수저, 고려 인종 24년(1146), 인종 장릉 출토,

인종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은수저이다. 숟가락은 구리가 소량 함유된 은으로 만들었는데, 자루의 단면이 납작하고 길게 휘어진 곡선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젓가락 역시 은으로 만들었으며 단면이 둥글고 끝마디에 음각의 홈이 장식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종의 무덤에 넣은 청동 도장, 고려 인종 24년(1146), 인종 장릉 출토,

불법 수호를 상징하는 동물인 사자 두 마리가 앞발로 보주(寶珠)를 받치고 서 있는 모양의 도장이다. 도장 면의 도형은 아직 그 의미가 판독되지 않았으나, 죽은 인종의 권위를 드높이는 상징물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에 죽은 왕의 시호를 올리면서 생전의 덕행을 기록한 옥책과 함께 시호를 새긴 도장을 만든 점도 참고할 만하다. 청자 참외모양 병, 고려 12세기, 고려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가 거의 유사한 청자병으로, 12세기 순청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사각 받침대, 청자 잔과 뚜껑, 고려 12세기,

청자 사각 받침대, 고려 12세기, 고려 인종(재위 1123~1146)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가 거의 유사한 청자 받침대이다. 용도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개 왕릉, 태묘와 같은 곳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의례에서 다과를 담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 잔과 뚜껑, 고려 12세기, 고려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와 색이 유사하나, 표면에 음각으로 넝쿨무늬가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궁궐터에서 출토된 벽돌과 새모양 토기, 고려, 개성 고려 궁궐터 출토,

개성 만우러대 고려 궁궐터에서 출토된 벽돌과 새 모양 토기이다. 벽돌은 궁궐 건축의 부재로 쓰였을 것이나, 새 모양 토기는 그 용도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출처:중앙박물관>

천자로 불린 고려왕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몽골이 일어난 13세기까지 동북아시아는 고려와 정통 중국 왕조인 송宋, 북방 민족이 세운 거란과 금金 등이 다원적인 세력관계를 이루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왕을 천자로 부르며 천자국에 맞는 국가 체제를 운영하였다. 왕을 천자.황제 등으로, 왕실을 황가로, 왕성을 황성으로 부르고, 왕의 명령을 제制, 또는 칙勅이라 한 것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송이나 거란.금 등에 조공하며 사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외교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려가 천자의 나라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높은 자긍심과 함께 당시 다원저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 스스로 또 다른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는 지방호족이었던 태조 왕건이 건국한 불교중심의 사회였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체제는 유학에 근거한 관료 중심의 사회였다. 강감찬, 윤관 등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들도 사실은 문신일 정도로 문신 우위의 사회였다. 문신 우위의 사회를 대표하는 유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들 수 있을 것이고, 각 문벌들의 흔적은 족보 등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청동도장, 고려, 개성 출토, 청자 원숭이 모양 도장, 고려, 개성 출토.

청동 도장, 고려, 개성 출토, 개성에서 출토된 청동제 도장들로 관료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손잡이는 사자나 물고기 등의 동물모양을 하고 있다. 도장 면에는 글자 외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가 표현되곤 한다. 청자 원숭이 모양 도장, 고려, 개성 출토.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관리 강민첨姜民瞻의 초상화,

 고려의 명장 강민첨(?~1021)의 초상화로 크기는 세로 80.7cm, 가로 61.5cm이다. 강민첨은 현종9년(1018)에 강감찬과 함께 10만 거란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11대 왕 문종은 그를 기리기 위해 초상화를 그려서 공신각에 모시게 하였다. 그림 윗부분에는 강민첨의 생애와 무덤 위치, 그리고 조선 정조 12년(1788) 진주 병사 이연필이 화가 박춘빈으로 하여금 옮겨 그리게 했다는 등의 내용이 쓰여 있다. 복두에 정장 차림으로 홀笏을 들고 앉아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의자 등받이의 호랑이 가죽은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 준다. 그림의 모본이 고려 당시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공신상의 형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정부가 편찬한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책, 삼국사기,

조선 선조6년(1573) 경주부 간행본, 고려 인종 23년(1145) 인종의 명으로 당대 최고의 유학자 김부식(1075~1151)의 주도하에 편찬된 관찬 역사서이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전체의 형식으로 서술하였다. 기전체는 왕들의 전기인 본기本紀, 신하의 전기인 열전列傳, 연표.세계표 등의 표, 관직.재정.예 등 각 분양의 변천을 지록한 지志로 이루어진 역사 서술 체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최고 문벌의 기틀을 마련한 이자연의 묘지명, 고려 문종 15년(1061), 개성 출토,

문종의 장인이자 순종.선종.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1003~1061)의 묘지명이다.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과 혼인시켰는데, 맏이인 인예태후가 순종.선종.숙종을 낳았다. 또 손녀 하나는 순종의 비가, 손녀 둘은 선종의 비가, 증손녀 셋은 예종 비와 인종 비가 되었다. 경원이씨는 이자겸 이후 문종 대부터 인종 대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대표적인 고려의 문벌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문벌 출신 학자 관료 최윤의의 묘지명, 고려 인종 16년(1162),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 최윤의(1102~1162)의 묘지명이다. 최윤의의 가문은 해주최씨로, 고조부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 이래로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손꼽히는 문벌이 되었다. 이 묘지명에 그 내령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윤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 편찬자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료와 문벌
고려시대 관료의 중심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도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강민첨이나,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문신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식은 음서라는 특권적 제도를 통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문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뒤늦게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과거는 중시되었다. 고려의 관료체제가 성숙되면서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고위 문신을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났다. 이들 문벌은 서로 얽히고 설킨 혼인으로 그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였는데, 이자연이 토대를 닦은 경원 이씨가 대표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개경에서 죽은 경주 향리 딸의 묘지명, 고려, 개성 출토,

경주 호장(향리의 최고직위) 김지원의 딸의 묘지명이다. 아버지의 이름만 새긴 것은 미혼으로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향리의 딸이 미혼인 채 개경에 묻힌 연유는 알 수 없다. 혹 지역 대표로 개경을 오가던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사망하자 개경에서 장례를 치른 것일 수도 있다. 여덟 잎 꽃 모양의 묘지명은 어린 딸에 대한 아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듯 하다.

향리들이 탑을 세운 과정을 기록한 문서, 정도 오층석탑 서성 형지기, 고려 현종 22년(1031), 경북 칠곡 정도사 터 석탑 출토,

약목군(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향리들이 정도사 석탑을 건립한 과정을 기록한 문서이다. 현종 10년(1019)부터 현종22년(1031)에 걸쳐 오층 석탑을 세운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1905년 경부선 철도를 건설할 때, 철도에 인접한 절터의 석탑을 해체하던 과정에서 탑 속의 놋그릇에 담긴채로 발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모범이 되는 향리들의 이야기, 연조귀감, 조선 고종27년(1890),

조선 정조1년(1777) 이진흥이 고려부터 조섬 말까지 뛰어난 향리들의 사적을 모아 3권2책으로 정리한 책이다. 권2는 고려의 향리55명의 열전으로 성명, 자호, 관력官歷, 일화 등을 출전을 밝혀 수록하였다. 고려의 향리가 나말여초의 호족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밝힌 부분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풍風”자 모양의 벼루, 고려, 안양 삼성산 출토,

향리나 그에 준하는 지방 유력 계층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벼루로서, 경질토기로 만들었다.

향리
고려시대 지방사회의 구심점은 향리였다. 그들은 비록 수령 아래에서 행정말단을 책임진 실무자였지만, 한때 그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의 후예답게 상당한 지위를 누리며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예컨대 향리의 대표격인 수호장은 고을 주민들로부터 조세.공물 등을 수취하여 중앙에 바칠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주민들을 이끄는 전투 지휘관이 되었으며, 정월초하루나 나라의 경조사가 있을때는 고을을 대표하여 개경의 국왕을 배알하기도 하였다. 또 수호장을 비롯한 향리들은 불탑 조성과 같은 각종 불사를 주도하거나 지역수호신인 성황신과 산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향리의 자식들 중에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 바탕에는 지역 사회에서 향리들이 지녔던 사회적.문화적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또한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거래가 있었던 시기로 신안 앞바다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도 알수 있듯이 도자기를 중심으로 송나라, 일본 등과 활발했던 무역활동을 엿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당시 강진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들이 고려의 수도이 개경으로 운송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역거래가 활발했던 당시 사회를 반영하여 송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으로 해동통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 금속화폐를 발행하여 화폐의 유통을 촉진하기도 했다

고려의 동전, 해동통보海東通寶,

숙종의 명으로 주조.발행한 동전이다. 앞면에 “해동통보”라고 새겼는데, 전서체가 특히 많다. 뒷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고려 정부는 이 해에 해동통보 15,000관을 문무 양반 관리와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점 등을 개설하여 이를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등 동전의 유통에 노력하였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뜻한다.

금속화폐 사용을 주장한 의천義天의 초상화(보물), 순천 선암사 소장.

의천은 고려 제15대 왕 숙종(재위1095~1105)의 친동생으로서, 송나라 유학 당시의 견문을 바탕으로 금속화폐의 이점을 조목조목 주장하여 숙종의 금속화폐 정책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의천이 주장한 동전의 이로움
전錢을 쓰면 운반하는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첫째이며, …. 간교한 (협잡)짓을 근절하여 곤궁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둘째이며,.. 녹봉의 절반을 전으로 지급하면 (농민들에게 녹봉미를 바치라는) 독촉을 줄이고 흉년을 대비할 수 있으며, 권세 있는 자를 누르고 청렴결백한 관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셋째이며, … (결세結稅를) 견고하게 비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여賜與하기도 매우 편리한 것이 그 이로움의 넷째이며, … – 『대각국사문집』 권12 –

삼한통보三韓通寶와 삼한중보三韓重寶, 고려 12세기,

고려 숙종 때 해동통보와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전들이다. 앞면에 다양한 서체로 “삼한통보”, 또는 “삼한중보”라 새겼고, 뒤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삼한”은 우리나라를 뜻하며, “중보”는 앞서 주조한 동전을 다시 발행할 때 흔히 붙이는 이름이다. 동국통보東國通寶, 고려 12세기, 고려 숙종 때 해동통보와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전이다. “동국”은 우리나라를 뜻한다.

관청에서 승인한 기름말(유두), 고려, 청주 사직동 사뇌사지 출토

고려시대 청주목의 사뇌사에서 기름 양을 측정하는 데에 쓰던 그릇이다. 옆면의 명문에는 청주목의 관리들이 이 기름말을 공인한 사실이 수결과 함께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기름말은 목牧 차원에서 공사의 저울과 섬.말.되.평미래를 검사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확인해 주는 실물자료라 할 수 있다. 안쪽 면에 새긴 선까지의 용량이 2,500cc이고 전체 용량은 5,000cc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화폐
고려시대의 기본 화폐는 쌀.베 등의 물품화폐였으나, 표준화된 금속화폐도 몇차례 주조.유통되었다. 최초의 금속화폐는 성종 15년(996)에 주조된 건원중보라는 철전인데, 강련한 반대론에 부딪혀 약6년 만에 유토이 중단되었다. 한편 숙종 때에는 은병(은1근)이라는 고액 화폐와 해동통보 등의 동전들도 주조.유통되었다. 동전 유통 정책은 승려 의천의 건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의 상업 발달 속에서 물품 화폐에 의존하던 문벌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 물품화폐가 제 기능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이들 동전은 그리 오래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에는 절제와 소박함을 강조하던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함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회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색감과 형태의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화려한 재질로 만들어진 생활용품 등이 남아 당시 지배층의 화려했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청자 풀꽃무늬 꽃모양 받침잔, 고려 12세기, 청자 연꽃 모양 연적, 고려 12세기,

청자 풀꽃무늬 꽃모양 받침잔, 고려 12세기, 꽃잎 모양의 청자 잔과 청자 받침이다. 모란.넝쿨.국화.연꽃무늬 등을 음각했다. 전남 강진구 대구면 사당리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 연꽃 모양 연적, 고려 12세기, 출토지인 고려 수도 개경의 상류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연꽃모양 연적이다. 연판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잣집의 청통물병
정병淨甁은 목이 긴 형태의 물병으로 원래 종교적 의물이었다.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데, 깨끗한 물은 사람들의 목마름과 고통을 씻어준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찰 뿐만 아니라 도교사원, 관청 등에서 두루 사용하였고 부잣집에서는 생활용품으로도 사용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경의 『고려도경』에서는 귀부인을 묘사하면서 부잣집에서 정병을 쓰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귀부인의 화장은 향유를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부잣집에서는 큰 자리를 깔고서 시비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과 정병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거북이 모양 주전자, 고려, 청동물병, 고려

청자 거북이 모양 주전자, 고려, 거북이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양의 주전자이다. 거북이는 음각으로 새겼고, 연꽃은 양각으로 표현하였다. 차분한 비색悲色 유약을 입혔다. 청동물병, 고려

상류층의 오락, 바둑
바둑 두기는 거문고 타기와 활쏘기, 말타기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상류층의 필수교양이었다.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바둑 관련 시가 있는데 대나무와 꽃을 배경으로 바둑과 술잔을 기울이던 고려시대 상류층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주사위와 바둑알, 개성 출토

은으로 만든 약통, 은제 약합, 고려 12세기, 금을 입힌 은합, 고려 12세기, 개성 출토, 금동으로 만든 장도집, 고려 12~13세기, 은으로 만든 장도집, 고려 12~13세기, 금을 입힌 은제 침통, 고려, 개성 출토

일상 속의 상류층 문화
고려시대에는 절제와 담백함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배층의 생활 도구에서는 실용성이나 소박함보다 다채로움과 세련됨이 돋보인다. 빛깔과 질감이 좋은 청자가 많이 사용된 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반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호사스러운 재질의 장도, 향합, 침통들도 당시 지배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생활 도구들이다. 활쏘기, 말타기, 거문고 연주 등과 함께 교양 있는 여가 활동으로 여겨지던 바둑도 상류층의 여유로운 일상을 대변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석탄, 메밀, 볍씨, 고려 12세기, 충남 태안 앞바다 출토,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난파선에서 나온 석탄, 조, 메밀이다. 청자 운반선의 선원들은 석탄을 이용하여 조나 메밀을 조리해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발견당시 청자와 목간들

선박에 실은 청자 꾸러미,

가마터에서 대량 생산된 청자는 운반하기 쉽도록 수십 개 단위로 포장되어 뱃길을 따라 개경에 공급되었다. 꾸러미에는 물건을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물건과 수량 등을 적은 꼬리표 목간을 달았다. <출처:중앙박물관>

강진청자의 바닷길 운송, 강진은 부안과 함께 고급 청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한 그릇들의 주요 소비층은 고려의 지배층이었다.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청자와 목간을 통해서도 강진 청자의 바닷길 운송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대접, 고려 11세기,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 해저 출토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려 사람들의 삶
서해안은 개경開京으로 통하는 바닷길이었다. 바다와 강을 이어 국내물류는 물론 국제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당시의 바닷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태안泰安이나 비안도 등 서해안 연안에서 고려시대 난파선이 발굴되었다. 건져 올린 여러 유물을 통해 고려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된다. 강진에서 대량생산된 청자들은 운반하기 쉽도록 수십 개 단위로 포장되어 뱃길을 따라 개경에 공급되었으며, 운반선의 선원들은 석탄을 이용하여 조나 메밀을 조리해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물병(정병), 매병, 병, 고려

참외모양 주전자, 고려

고려시대의 도기陶器
고려시대의 도자기라 하면 흔히 청자靑磁를 떠올린다. 그러나 고려사람들이 생활용기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청자 같은 자기가 아닌 도기였다. 도기는 유약을 바르고 높은 온도에서 재벌구이를 거쳐야 만들어지는 자기나 청동으로 만든 제품들보다 크게 저렴하였다. 게다가 항아리같이 신분과 계층을 막론하고 두루 사용한 저장 용기들은 대개 도기로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도기류

단지(壺), 고려, 강진 삼흥리 출토, 병, 고려, 충주 본리 출토

병, 고려, 청주 봉명동 출토, 단지, 고려, 화천 오음리 발견

유적 출토 고려 도기
고려시대의 무덤이나 생활 유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대체로 접시나 대접, 완碗, 잔처럼 크기가 작은 것들은 청자 제품이, 항아리나 병처럼 상대적으로 큰 것들은 도기 제품이 많이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배기나 잔, 발鉢 등을 도기로 만든 것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청동 또는 청자로 만든 병이나 정병, 주전자 등을 모방한 도기들도 있는데, 일반 도기들보다 질이 좋은 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로 만든 기와, 고려 12세기,

고려시대 건물의 건축부재로 사용되었던 청자기와이다. 『고려사』에는 의종11년(1157) 양이정養怡亭을 짓고 그 지붕을 청자로 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청자기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막새 면에는 두 겹의 원 테두리를 음각하였고, 바깥 테두리에는 연밥문을, 안쪽 테두리에는 모란문을 양각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기와로 지붕을 인 양이전
.. 또 민가 50여구를 헐어 대평정을 짓고…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에는 양화정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 또 옥석을 갈아 환희.미성 두 대를 쌓고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멀리서 물을 끌어 비천을 만들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다하니…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11년4월

고려시대 개관
후삼국으로 분열된 통일신라 말기의 상황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태조19년, 936). 우리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 왕조가 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향한 북진정책과 발해 유민 포용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해 신분 상승의 길을 넓히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완화함으로써 통일신라에 비해 한층 진전된 면모를 보였다. 고려는 고려.송.거란.여진(금)으로 이루어진 동북아시아의 다원적 질서 속에서 천자국을 자처하며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과 단호한 군사적 대응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켜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12세기에 들어 특유의 청자 문화를 꽃피우는 등 화려한 귀족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으로 문벌귀족 체제에 균열이 생기더니, 마침내 무신정변의 발발로 국왕과 문신 중심의 정치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의종24, 1170). 권력을 잡은 무신들간의 권력 투쟁과 농민 반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승려 지눌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13세기 들어 무신정권은 최씨 일가의 무단통치로 안정을 되찾았으나, 중국 대륙을 장악한 몽골은 이러한 고려를 압박해왔다. 최씨 무신정권과 백성들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가운데 약 30년 간 몽골 침략군에 맞서 싸웠다. 세계적 불교 유산인 팔만대장경은 이 무렵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고려인들이 새긴 것이었다. 그러나 거세지는 몽골의 압박과 무신정권의 연이은 몰락으로 개경환도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마침내 원(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원종11년, 1270). 80여 년에 걸친 원나라의 간섭아래에서 고려인들은 공녀와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등 엄청난 고통을 입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성리학과 화약 제조 기술, 목면 등을 원나라로부터 도입함으로써 문자와 과학 기술 등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우왕3년, 1377)이 말해주듯이 금속활자 인쇄의 맥이 이어지고 있었다. 14세기 중반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퇴를 틈타 반원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토지 개혁 등에도 적극 나섰으나 지지세력의 부재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성리학 중시 정책으로 성장한 정도전 등 일부 급진파 신진 세력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손잡고 대대적인 토지제도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공양왕3년, 1891) 새 왕조 개창의 명분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