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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과 예문관, 국왕의 정책을 자문하고 보필하는 기관

창덕궁 금천 동쪽편에는 궐내각사로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이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홍문관은 원래 왕실을 서적을 관리하고 국왕을 자문을 정책연구기관이었다. 반면에 예문관은 승정원처럼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 짓는 등 실무적으로 국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기관이다. 창덕궁 궐내각사 중 국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예문관과 내의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국정을 자문하는 홍문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문관, 내의원 등은 정전 옆 작은 출입문을 통해 정전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에서 집현전이 근정전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던 것과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창덕궁 궐내각사가 먼저 복원되었다.

<동궐도에 나타난 궐내각사 중 홍문관과 예문관>

<궐내각사>

창덕궁 금천교를 건너면 정면에 진선문이 있고, 북쪽편에 궐내각사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조선시대 엘리트들이 선호했던 삼사 중 하나인 홍문관 건물이 있다. 홍문관은 세종대 집현전의 기능 중 왕실 도서의 수집.출판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진 부서지만, 실제로는 학문을 연구하고 국왕을 자문하는 중요한 요직이었으며, 국왕이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 참여하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곳으로 여겨졌다.

홍문관(弘文館), 국왕을 자문하는 정책연구기관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언론 삼사라 불리며,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 판서나 정승 등 고위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부서 중 하나였다. 홍문관은 영사와 대제학에서 부제학, 직제학, 교리 등 다양한 직책의 관원들로 구성되며, 3정승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원래는 세조대에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국가의 서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을 맡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홍문관 대제학은 조선사회에서 학문의 수장으로 여겨지며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맡았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론삼사는 조선시대 관직 중에서도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직으로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경력 중 가장 중요시 된다. 지금도 서원에 모셔진 많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런 관직을 거쳐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옥당>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주변 행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구조는 대체로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기관답게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과는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정문을 통해서만 옥당으로 출입할 수 있다.

<‘홍문관’현판(1699년)>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으로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1699년(숙종25) 당시 홍문관 응교였던 김진규(1658~1716년0의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옥당 출입문>

행각으로 이루어진 옥당 출입문을 들어서면 특이하게 담장으로 막혀있고, 3개의 작은 쪽문을 두고 있다. 외부에서 홍문관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옥당 내부를 출입하는 작은 쪽문>

3면에 쪽문을 두고 있으며, 가운데 쪽문은 옥당 건물로, 양쪽 쪽문은 행각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옥당 마당 앞에 세워진 담장>

내부 전체적으로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고, 통행은 담장 사이로 가능하지만, 시야를 가려주어 각건물내에서 하는 일들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옥당 마당 담장 바깥에서 본 옥당>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만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옥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궁궐 밖 육조거리에 있었던 주요 관청 건물에 비해서 건물 규모는 작은 편이다. 이 건물에서는 대제학을 비롯하여 고위직 인사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홍문관 관리들은 과거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집안배경이나 정치적 위상이 높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 하위직이라 할지라도 궁궐정문 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

<출입문 옆 행각>

다른 건물의 행각에 비해서 격식있게 구성되어 있다. 홍문관 하위직 관리들이 근무하던 장소로 보인다. 도서의 수집.관리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책방으로 행각에 다락방들을 많이 두고 있다.

<서적과 문서들을 보관하던 다락방으로 이루어진 서쪽편 행각>

<옥당 뒷마당>

뒷편에는 별도의 건물을 두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삼사에 속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궐내에 위치하고 있어 건물은 협소한 편이다.

<홍문관지, 1784년(정조8)>

이노춘 등 지음, 홍문관의 연혁, 직관, 담당업무 등을 기록한 도서이다.

<경현당 어제 어필 화재첩, 1741년>

영조가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기념해 승정원.홍문관 관원들에게 경현당에서 술일 내린 일을 기록한 첩이다.

예문관(藝文館),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글을 대필하는 기관으로 세조대에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도서출판의 기능은 홍문관으로, 학술연구는 예문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체로 홍문관과 예문관은 학술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홍문관은 왕을 자문하는 역할로 견제의 기능을 갖고 있어 삼사 중 하나로 여겼고, 예문관은 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으로 비서실격인 승정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문관는 영사(정1품)을 비롯하여 실무진인 대교(정8품), 검열(정9품)까지 여러 직책이 있으나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를 비롯하여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는 등 대부분의 직책은 홍문관을 비롯하여 다른 부서에서 그 직책을 겸하기때문에 실제로는 홍문관 관원이 겸임하는 봉교(정7품) 이하의 관원으로 구성된 실무부서라고 할 수 있다.

<예문관>

창덕궁 정전 회랑과 붙어 있는 예문관은 단독건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행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국왕을 가까운 거리에 보좌하는 관원들의 근무하던 건물로 건물자체는 격식이 있게 꾸며져 있다. 예문관 건물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전 서쪽편 출입문>

예문관은 국왕의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과 함께 정전인 인정전 회랑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전 서쪽편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서 출입이 가능하다.

<창덕궁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한 건물들>

예문관 바깥쪽으로 선원전 재실 기능을 했던 양지당이란 건물이 있고, 그 바깥쪽에 마당이 있는 큰 건물이 있다.

<인정전 서쪽편 행각>

국왕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예문관, 내의원 등 궐내각사와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으며, 행각 끝에는 향과  축문을 관리하는 향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