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영(壯勇營)은 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으로 국왕을 호위하는 직할부대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집권초기 자신을 시해하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785년 국왕호위를 전담할 장용위(壯勇衛)를 창설하였으며, 1793년에는 이를 군영(軍營)의 하나인 장용영으로 확대개편하였다. 장용은 크게 한양에 주둔하면서 궁궐을 호위하는 내영과 수원화성에 주둔하면서 외곽방어를 지원하는 외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후기 수도를 방어하는 중앙의 5군영은 조선후기에 형성된 무반가문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들은 노론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과 결탁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던 비변사(備邊司)가 있었다. 집권 정통성이 취약했던 영조와 정조는 기득권 세력에 장악된 5군영에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사도세자의 비극 또한 이들 세력과 타협한 결과로 볼 수 도 있다. 정조는 집권후 이를 혁파하기 위한 군제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원화성 건설과 장용영의 설치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조 사후 장용영은 혁파되었으며, 기득권세력의 기반이었던 비변사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장용영 편액 탁본첩,
수원 화성에는 외장용영이 설치되어 약 5천여명의 군사가 주둔했으며, 인근 고을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에 별도로 약8천명의 군대가 주둔하였다. 외장용영의 지휘를 받는 군대들은 남한산성 등에 설치된 5군영 소속의 기존 군대를 견제하고, 비상시 국왕을 호위할 수 있는 직할부대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외장용영은 5위체제로 화성의 4대문과 행궁에 주둔하였으며으며, 정조의 화성행차시 정조를 호위하고 화성에서 훈련을 지속적을 실시하여 조선최고의 군대로 평가받고 있다. 정조는 화성에 주둔한 외장용영을 위해 주변지역에 둔전을 개발하여 군대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게 하였다.
위풍당당 장용영(壯勇營)
장용영은 1785년 왕권 강화와 국방 호위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한 장용위(壯勇衛)의 규모를 더욱 확대시켜 1793년(정조17) 창설한 군영이다. 장용영은 크게 도성 중심의 내영(內營)과 수원 중심의 외영(外營)으로 구성되었다. 내영의 지휘관은 장용사(壯勇使) 또는 장용영 대장이라 하였다. 외영의 지휘관인 장용외사(壯勇外使)는 수원유수가 겸직하였다.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호위하고자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부터는 도성의 내영보다 수원의 외영이 더 중요한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매년 수원에서 무과 시험을 실시하여 능력있는 무인들을 선발하고 장용외영에 소속시켜 수원화성의 방비는 물론 왕권도 지속적으로 강화시켰다. 외영을 중심으로 수원화성 주변의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 등 다섯 고을을 함께 묶어 독자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수원화성에 5천명 그리고 나머지 다섯 고을에 8천명 등 총병력 1만3천명이 주둔하였다. 장용영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였으마 정조가 승하하자 1802년(순조2) 혁파되고 말았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전령(傳令),
1793년 5월24일 장용영 내영에서 수원외사 채제공에게 보낸 전령이다. 그해 1월25일 장용영 내외영의 절목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서구의 발의에 따라 새로운 장용영 절목을 만들었다. 그런데 절목에 따르면 외영의 인사고과에 내영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문제이니 채제공에게 이를 중앙에 아뢰어 고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고풍(古風),
1792년 정조가 유엽전 50발을 쏘아 48발을 맞춘 뒤 기쁨을 나누기 위해 장용영 관원 오의상에게 조기1마리, 웅어 1두름을 내려준다는 내용의 공풍이다. 정조 어사(御射)와 관련하여 활쏘기 성적이 잘 나오면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축하의 뜻으로 선물을 청해 받는 것을 고풍이라 하며, 이때 작성된 문서도 또한 고풍이라 한다.
활(弓), 조선시대, 복합(우각,목재),
활시위를 걸지 않은 활이다. 복합궁의 형태로 나무와 뿔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화살통, 조선시대, 목재,
활을 보관하고 휴대하기 위한 통이다. 원형의 화살통은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며 1927년 제작된 것이다. 다른 화살통은 목재를 깎아 만들었다.
깍지,
활시위를 당길 때 엄지손가락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착용한 반지로 뾰쪽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활시위를 당기는 부분이다.
조선도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검 종류는 한쪽 날이 있을 경우 도刀, 양쪽에 다 있을 경우 검劍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정조대 편찬된 「무예도보통지」를 살펴보아도 엄격히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도검은 칼의 길이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짧고 한손 사용을 기본으로 하되 양손 사용도 겸할 수 있는 형태가 많았다. 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간으한 패용 방법인 띠돈방식으로 칼을 패용(佩用)하며 다른 무기도 함께 휴대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전통무기 가운데 고리를 사용하여 패용하였던 도검을 환도(環刀)라고 하였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소장된 도검 중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대모보도(玳瑁寶刀)이다. 왕실과 관련된 희귀한 도검이기에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전시된 도검류는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우수한 도검으로 정조의 친위군대였던 장용영 군사들도 모두 이와 같은 도검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환도(環刀), 조선후기, 철제,
전체가 은으로 장식되어 있는 환도이다. 칼집을 대나무 형태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환도, 조선후기, 철제,
조선시대 대표적인 단경기로, 환도라고 부르는 것은 칼집에 띠돈(고리)이 있기때문이다. 이 환도는 상어껍질과 뿔로 장식되어 있다.
보검, 조선후기, 철제,
대보玳瑁(열대지방의 바다거북 등껍데기)와 옥, 금, 은을 사용하여 만든 칼로 왕족과 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 소유했던 보검이다.
대모보도
중요한 특징은 보도의 칼자루와 칼집의 재질이 일반 환도에 비해 매우 귀한 재료로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즉, 여러 나무를 활용한 보강재 위에 대모 곧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외피로 사용하여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대모를 활용한 보도의 경우에는 사용자가 일반인이 아니고 군왕 내지는 왕실과 관련된 최상위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도검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1861년 철종 어진에 나타나 있다. 이 어도와 비교해 볼 때 칼집의 아랫마개 장식, 윗마개 장식만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유물로 볼 수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환도, 조선후기, 철제,
전형적인 관제(官製)형태의 환도이다. 띠돈이 옥으로 되어 있으며 장식은 은으로 되어 있어 높은 신분층의 사람이 사용한 것이다.
정조의 든든한 신하, 번암 채제공
“진실로 사심이 없는 나의 신하이고 세손의 충신이다.”
이는 일찍이 영조가 채제공을 일러 정조에게 한 말로, 당대 최고의 신임을 받은 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채제공 초상 시복본,
1792년(정조16)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의 전신좌상 시복본 초상이다. 1791년(정조15) 규장각이 주관하여 정조 40세 어진을 그릴때 채제공이 총찰을 맡았고 주관화사는 이명기, 동참화사는 김홍도였다. 정조는 어진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채제공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초상 시복본을 그려주도록 명하였다. 화면 좌측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있다. 정조로부터 선물 받은 부채와 선추를 영원히 기념하려는 듯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선추를 들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전령(傳令),
정조는 1793년(정조17) 자신의 친위군이라 할 수 있는 장용영을 내외영으로 구분하여 수원부에 외영을 신설하고 1월12일 수원부사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켰다. 이 문서는 수원유수 채제공에게 장용외사壯勇外使를 겸하도록 임명한 전령이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정조의 수결이 있고 어보는 ‘시명지보’를 날인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대의 병법 연구와 각종 무예서 편찬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무예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무예 연마 및 병법 연구에 심취하였다. 사도세자의 명으로 1759년 편찬된 「무예신보武藝新譜」는 1598년 한교가 편찬한 6가지 무예로 이루어진 「무예제보武藝諸譜」를 바탕으로 18가지 기예에 대하여 다룬 무예서이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뜻을 이은 정조는 병법 연구에 심혈을 기우려 왕명으로 「병학통」(1785년), 「병학지남」(1787년) 등의 무예서를 편찬하여 조선후기 군대조련의 지침으로 삼았다. 마침내 1790년 정조는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에게 명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사도세자가 주도하여 편찬한 18가지 무예로 이루어진 「무예신보」를 참고하여 무예24기를 정립한 종합무예서이다. 이렇듯 각종 무예서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는 장용영의 교본이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유득공의 감독 아래 편집, 간행된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이다. 총14권8책으로 구성된 문집에는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비문.제문 등을 비롯하여 정조의 윤음.임진왜란 활약 당시의 교유.사제문.세보와 같은 관련 문건이 망라되어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병학지남(兵學指南),
1787년 정조의 명으로 이유경이 교감하여 어제서를 붙여 장용영에서 간행한 병법서이다. ‘지남’은 나침반 혹은 길잡이라는 뜻으로 이 책은 결국 ‘군사학의 길잡이’로 조선후기 군사훈련의 기본침서가 되었다. 왜구진압으로 명성을 떨친 명나라 장군 척계광 「기효신서」를 요약하면서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리하고 보충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병학통(兵學通),
1777년(정조1) 형조판서 겸 지훈련원사인 장지항이 정조의 명으로 편찬하고 서명선 등 무신 8명의 교열을 거쳐 1785년(정조9) 간행되었다. 군사들의 강서 시험에도 사용된 「병학통」은 조선후기의 병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책머리에 정조의 어제서가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기효신서(紀效新書),
1560년 명나라 절강의 참장으로 있던 척계광이 자신이 개발, 정비한 무기의 제조법과 사용법, 훈련방법과 진형, 신호법 등을 정리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절강병과 이 진법으로 일본군을 격퇴하자, 선조는 이 책을 입수하여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의 군대 전술, 무기의 무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마구류, 말에 착용시키는 마구류에는 안장, 발받침, 재갈, 방울 등이 있다.
마구류 중 말안장
정조의 군제 개혁
국방비를 아끼고 군사를 정예화하려는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선후기 수도를 방위하는 중앙의 5군영은 17세기에 들어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무반 가문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들은 정치 세력과 결탁하여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더불어 국가 재정의 56%를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어 국가 경제를 어려움에 빠뜨렸다. 이와 같은 현실을 타파하고자 정조는 쓸모 없는 군인을 없애고 여러 군영을 통합하여, 국방비를 아끼고 군사를 정예화하려는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다. 1778년(정조2) 6월 국방개혁을 포함하는 4대 국가 개혁 방침을 선언하였다. 이는 자신이 국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군사 통수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 위해 정조는 5군영의 대장이 병조판서의 지시를 받게 하였으며, 통어영과 진무영을 통합하여 수어경청을 없앴다. 그리고 오군영의 대폭적인 축소와 국방비 감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각 군영에 소속된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을 확대하여 이곳에서 거둔 수입금으로 군사들의 급료를 해결하여 군포 납부를 없애고자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 화성을 지키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였다. 이 장용영은 한양과 화성에 두었는데, 그 중심 부대는 화성을 지키게 하였고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로 군사들을 단련시켰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용용내외영’이라 하지 않고 ‘장용영외내영’이라고 불렀다. 장용영외영은 초기에는 현륭원과 화성행궁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화성을 쌓고 화성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수도 남족을 방어하는 중심부대가 되었다. 장용영외영은 화성을 중심으로 5위 체제로 편성되는 장락대와 수원 외곽 5읍에서 수원을 수호하는 협수체제로 분리되어 있었다. 장용영은 정조의 화성 행차 시 정조를 호위하고 화성에서 훈련을 지속적을 실시한 결과 조선 최고의 군대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 장용영의 군사 현황.
동.서.남.북 성문과 행궁에 약 14,000여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그 보다 적었겠지만 상당한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조 사후 장용영은 혁파되었다고 한다.
5위(장락대) 군사현황, 화성 주변에 수천여명이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화성의 무기들
화성에는 조선후기 무기 발달에 따라 먼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불랑기포와 쇠뇌가 중심이었다. 불랑기(佛狼機)는 16세기 초에 중국에 도입된 유럽식 대포로 불랑은 Frank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로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나 특정 국가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15세기경의 유럽을 총칭하는 말이다. 화성에 설치된 불랑기는 1517년경에 유럽의 상선을 통하여 포르투갈 계열의 대포가 중국 광동에 전해진 이후 청나라의 대포를 받아들인 것이다. 「기효신서」에 의하면 불랑기는 크기에 따라 1호기에서 5호까지 다섯 종류가 있는데 1호는 9척이며 5호는 1척 밖에 되지 않는 걸로 봐서 1호와 2호는 대형포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성에서는 3곳의 공심돈에 불랑기를 설치하여 외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쇠뇌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신라시대의 천보뢰는 큰 활과 같은 기계에 날카롭고 긴 창으로 화살을 삼아서 쏘는 쇠뇌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비격진천뢰 등과 함께 쇠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후기에는 쇠뇌 사용이 줄어들었지만 화성에서는 쇠뇌를 개량하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와 창룡문 옆의 동북노대에 설치하여 주력무기로 사용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화성의 무기들
보병의 주력무기인 각종 창들. 죽장창(길이20자), 장창(길이15자), 월도(날길이 2자8촌, 칼자루 6자4촌), 기창(창날 9촌, 자루 9자), 당파(길이7자6촌), 협도(날길이3자, 칼자루 7자), 편곤(길이 5자9촌), 곤방(길이7자) 등이 있다.
제독검,
환도,
쌍검,
방패
조총, 복제품,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을 물고 있던 용두가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던 총, 단조총, 복제품, 기병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총신이 짧은 조총
불랑기, 복제품,
포탄을 발사하는 모포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하는 자로가 분리되어 보다 빠른 속도로 장전할 수 있던 화포.
신기전 화차.
호준포
삼혈포
블랑기포
화살
녹로노.
호수,
김후가 사용하던 것으로 전하는 호수와 그것을 보관하는 함이다. 호수는 무관이 융복차림을 할 때 머리에 쓰던 주립에 꽂는 장식품이다. 호랑이 수염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로 보리이삭이나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다. 김후 호수는 시료 분석 결과 새의 깃털로 확인되었다. 호수는 무관의 상징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김후 초상, 1796년(정조20).
김후는 화성성역 초기부터 참여하여 1794년(정조18) 독성중군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1796년(정조20) 성역을 마친 뒤에 정조는 김후에게 특별히 길이 잘든 말 1필을 하사하였는데, 이때를 기념하여 이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하였다.
장용영 대장의 의례용 복식
수원화성 축성시 처음 만들어진 공심돈. 내부에 블랑기포나 조총으로 사격할 수 있다.
수원화성 공심돈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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