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인 비우당(庇雨堂)이다. 집터는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동.서.남.북 봉우리 중 가장 낮은 서쪽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동쪽 상산 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이수광은 조선중기 실학자의 선구자로 세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유구,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은 물론 영국, 포르투갈 등 서양세계를 비롯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백과사전 성격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을 저술하였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까지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세번씩이나 다녀올 정도로 고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살았던 작은 초가집은 당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우당>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성곽 동쪽편 자락에 위치한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인 비우당에 복원해 놓은 초가집이다. 앞변 3칸의 ‘-‘자형 집으로 당시 서민들이 살았던 주택의 규모를 하고 있다. 이수광은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인물이지만 작은 초가집에서 소박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저택의 규모는 작지만, 낙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책을 읽고 저술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자락을 따라서 쌓은 성곽>
<비우당으로 내려가는 입구>
집터에는 이수광이 살았던 집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쪽 인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현재의 가옥은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집터 뒷편에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주동샘과 거북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다.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옛터에 복원한 작은 초가집>
지금은 주변에 숲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무가 없고 언덕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툇마루>
툇마루에 걸터 앉아 언덕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다.
< 마당 뒷편에 남아 있는 자주동샘>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샘이다. 뒷편 바위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주동샘 뒷편에 남아 있는 거북바위>
단종비 정순왕후가 꿈에 단종이 거북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비우당, 서울 종로구 창신동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동원비우당기’에 이러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동지세류에서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북령소송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 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고, 타락청운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아차모우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하였다. 전계세족에서는 비가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에 드러눕는다고 하였고, 후포채지에서는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처럼 살고 싶다 하였다. 암동심화에서는 복사꽃 핀 꼴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였고, 신정대월에서는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하였다.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자지동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 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위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탄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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