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 있었던 고택 중 남아 있는 많지 않은 대저택 중 하나인 장교동 한규설 가옥이다. 청계천 하류에서 다섯번째 다리였던 장통교부근에 있던 대저택으로 구한말 대한제국 한성판윤을 역임했던 한규설이 살았던 집이다. 저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 구한말 상류층이 살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자형 건물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뒷편으로 날개채를 달아내어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하고 있다. 또한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로 서양식 보일러가 도입되었던 집이다. 이 가옥을 지은 것은 189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며, 구한말 서양의 건축양식이 일부 반영되었다. 이 가옥은 1970년대 도심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있던 것을 당시 쌍용그룹 창업주 부인이 국민대학교 교정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지금은 전통다도 보급을 위한 명원민속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규설(1848~1930)은 무관출신으로 구한말 대한제국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일제와 의사늑약 체결을 극구 반대하다 파직되었으며, 일제에 남작작위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칩거하다기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설립하고 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정릉 국민대학교 교정으로 옮긴 ‘장교동 한규설가옥’>
구한말에 지어진 도심 상류층 저택으로 동남쪽에 출입문인 솟을대문이 있고,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 등에 별도의 독립된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문채>
저택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양쪽으로 작은 방들이 있는 구성된 대문채. 도시형 한옥으로 골목길을 향해 창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행랑채>
안채 마당에 있는 행랑채도 바깥쪽 골목길을 향대 창문을 두고 있다.
<솟을대문>
한규설은 구한말 한성판윤을 지낸 고위직 인물로 문간채에 가마를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솟을대문 남쪽편 문간채>
집안을 돌보는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중문 문간채>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따로 두고 있다. 중문에도 문간채를 두고 있다. 이 저택에 살았던 하인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택 바깥주인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사랑채>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형으로 보이는 건물이지만, 뒷편에 날개채가 있어 실제로는 ‘ㄱ’자형을 하고 있다. 남쪽 지방 고택의 사랑채와는 달리 개방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고, 문을 달아 놓았다.
<처마와 공포>
공포와 단청을 사용하지 않지만 겹처마를 사용해서 화려해 보인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하는 문과 중문 문간채>
문간채 방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고, 안쪽에는 광을 배치해 놓았다.
<안주인과 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채>
건물은 앞면 8칸으로 ‘-‘자형 주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뒷편에 날개채를 달아내어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을 넓은 대청마루로 사용하고 있으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처마와 공포>
단청이나 공포를 사용하지 않지만 구한말 전통 법규가 해체되는 시기에 지어졌기때문에 겹처마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마루>
대가족이 살았던 대저택으로 집안 행사를 위해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연등천장>
<뒤에서 본 모습>
<부엌과 온돌방으로 이루어진 날개채.>
건물은 앞에서 보면 ‘-‘자형 건물처럼 보이지만, 부엌 등이 있는 날개채를 달아내어 실제로는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안채 마당>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을 가지고 있으며,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문간채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안채 마당>
대문에서는 중문, 사랑채와는 작은 협문을 통해 안채를 출입한다.
<사랑채를 출입하는 작은 협문>
<대문에서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과 행랑채>
<별채>
안채 뒤에 국민대학교 다도모임에서 사용하고 있는 작은 별채와 곳간채가 있다. 담장은 없지만 안채 마당과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
이 건물은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 있던 조선후기의 양반가옥으로 구한말 한성판윤과 의정부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1848~1930)대감이 살던 집이다. 솟을대문, 안채, 사랑채, 별채, 행랑채 등으로 나뉜 가옥 형태는 19세기 서울지역 전통 양반 가옥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민속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민대학교는 성곡 김성곤선생의 부인이신 명원 김미희 여사가 원 소유주인 박준현 선생의 부인 하옥순 여사로부터 기증받은 이 건물을 1980년 12월 20일 현위치에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국민대학교는 이 건물을 명원민속관으로 명명하여, 전통다도의 보급과 학생들의 생활교육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출처:국민대학교>
<별채>
별채는 부엌, 작은 마루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독립된 주거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결혼한 자식들이 임시로 살았던 공간으로 보인다.
<별채 마루>
<별채와 같이 있는 곳간채>
<사당>
안채 뒷편으로 사당과 행랑채는 넓은 마당이 있다. 지방의 대저택과는 달리 사당을 담장으로 분리하지 않았다. 사당 옆으로 장독대가 있는데 상류층 저택이지만 장독대의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
<행랑채>
행랑채는 앞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인들이나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안채 뒷편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작은 협문>
<안채와 행랑채 사이의 마당>
한양 도심에 있었던 저택이지만, 마당을 넓게 사용하고 있다.
장교동은 조선시대 서울의 5부 52방 중 장통있었던 곳이라고 하며 부근에 긴 창고건물이 있어 청계천 다리를 창창교라 불렀으며 장교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청계천 광통교와 장통교 일대는 지금도 서울에서 제일 번화한 도심으로 구한말 역관과 의관 등 기술직 중인들의 집중적인 거주지였다. 오늘날 이들의 직업은 의사, 외교관에 해당하는 전문직으로 서구문물의 도입과 함께 이들이 실세로 떠오르던 인물들이었다. 이 가옥과 비슷한 시기에 광교와 장통교 일대에 있었던 가옥으로는 삼각동 조흥은행 건물 뒷편에 있던 것을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긴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가옥’이 있다.
<이 저택이 있었던 장통교 부근>
<조선시대 큰 시장이 있었던 장통교 부근 모형(서울역사박물관)>
<장교동 청계천 부근 광장>
이지역은 구한말 역관들을 비롯한 개화기 주도세력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서울 장교동 한규설 가옥, 서울 성북구 정릉동
이 집은 18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대한제국기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1848~1930)이 살았던 곳이다. 한규설은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하다 파면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원래 중구 장교동에 있던 집을 1980년 12월20일 국민대학교로 옮겨 새로 지었는데, 이 때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 중문간 행랑채와 사잇담 등을 새로 지어 원형을 찾았다. 이 집에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 사당 등 여러 채가 있고 각각에 맞추어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사당마당 등 마당도 나뉘어 있다. 이는 채와 마당이 짝을 이루는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정면에서 보면 반듯한 ‘-‘자형인데, 뒤로 튀어나간 부분을 두어 외부는 단정하게 하고 내부는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툇마루가 집의 앞뒤로 놓이고 서양식 난방방식을 도입하는 등 조선후기 주택 건축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서울시청>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