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카 문명(Aztecs)은 멕시코 지역에 살았던 아스테카 사람들이 만든 문명이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도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인공섬 테노치치틀란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국가들과 함께 발전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멕시코 지역의 높은 문화 수준을 이루며 살았다. 지배세력인 아스테크인들은 틀라스포칼, 케스코코 사람들과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며서 제국을 유지했다.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내부 정치적인 분열을 이용하여 침입하면서 멸망했다.
<독수리전사><전사모양 기둥>
멕시코는 북아메리카 남부에 삼각형을 모양을 하고 있다. 북쪽은 미국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폭이 2,000km가 넘으며, 남쪽은 과테말라 등과 맞대고 있는데 폭은 약 220km 정도로 지협을 이루고 있다. 중부지역은 넓고 높은 고원지대이며 해안은 열대나 아열대 지역이다. 국도의 대부분이 건조지역으로 강수량은 많지 않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옥수수는 생존에 필수적인 곡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식량자원이다.
<1. 거북이,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현무암,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아스테카에서 바다거북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거북이 등딱지는 작은북 등 다양한 악기를 만드는 데도 쓰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메뚜기,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돌,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메뚜기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우기가 지나면 메뚜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스테카는 종종 메뚜기 떼의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중요한 식량 자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메뚜기를 기름에 튀겨 고추, 라임, 소금 등을 뿌려 먹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 올빼미,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현무암, 스위스 바젤 문화박물관>
올빼미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원주민 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를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 물벼룩,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안산암,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물과 관련 있는 동물을 돌로 만들고, 이를 한데 모아 비의 신 틀랄룩이 사는 세상을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물벼룩은 아스테카의 중심지 테노츠니틀린에 바친 공물 가운데 하나 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신성한 자연
아스테카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대지를 틀랄테쿠틀리 신에 비유 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생명이 그녀의 몸에서 자라 난다고 믿었습니다. 풀과 나무는 그녀의 머리카락이고 샘은 눈이며 강과 동굴은 입이었습니다. 또한 동물과 식물, 호수, 산 등 모든 자연의 요소마다 고유한 신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가장 중요한 식물은 옥수수로,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옥수수의 여러 성장 단계에 해당하는 고유한 신이 존재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는 다양한 민족과 도시국가들이 있었다. 도시국가에는 신전과 궁전, 시장이 있었고, 통치자인 틀라토니아와 귀족, 사제, 장인, 무역상, 평민, 노예 등이 함께 거주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시하였고 동물과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다. 삶은 제의용 달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파종과 수확에 가장 좋은 날을 결정하고 결혼을 하거나 긴 여행을 떠나는 등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 비의 신 틀랄록 장식판,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돌,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비의 신 틀랄록은 멕시코 중앙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틀랄록의 얼굴은 마치 안경을 쓴 듯한 눈과 재규어 같은 송곳니가 특징입니다. 틀랄록은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인 속성을 가졌습니다. 비를 내려 생명이 자라나게 하고 대지에 풍요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이를 파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스테카 신화에 따르면 ‘세번째 태양’ 세상은 틀랄록의 시대로 불의 비가 내려 멸망했다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옥수수의 신 치코메코아틀,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돌,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일곱 마리의 뱀’이라는 뜻의 치코메코아틀은 식량과 대지, 옥수수의 신입니다. 얼굴과 몸에 붉은 칠을 하였고 머리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인 아마틀(amtl)로 만든 화려한 장식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어린 옥수수의 신 실로넨, 복제품, 진품은 1350~1521년경, 토기,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옥수수는 메소아메리카 문화권의 주식입니다. 아스테카의 달력은 옥수수의 성장 주기를 반영하였고 각 성장 단계에 따라 그에 해당하는 신이 존재할 정도였습니다. 실로넨 신은 갓 발아한 옥수수 새싹을 상징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황금술통 선인장,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돌, 멕시코 테플로마요르박물관>
멕시코에는 볼리바아 다음으로 다양한 종류의 선인장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아스테카에서 선인장은 매우 중요한 식물자원이었습니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그들은 오랜 유랑생활을 끝내고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앉았던 테스코코 호수의 섬에 정창했습니다. 선인장 가시는 피를 바치는 희생제의에서 사요용되었으며, 열매와 줄기는 음식으로 즐겼습니다. 선인장의 수액을 발효시킨 알코올음료 폴케는 신성한 제의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물과 풍요의 신 찰치우틀리쿠에 화로, 아스테카 16세기 초, 토기,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뒤에서 본 모습>
‘비취색 치마’라는 뜻의 찰치우트리쿠에는 강, 샘, 호수를 비롯한 모든 물의 신입니다. 비의 신 틀랄록의 아내로 알려졌으나, 일부 신화에서는 누이로도 등장합니다. 아스테카의 여러 조각상에는 찰치우틀리쿠에를 무기력하게 패배한 모습으로 묘사하여 아스테카 사람들이 주변 호수를 길들인 것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스페인 점령 후 1555년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난 홍수는 찰치우틀리쿠에가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물과 풍요의 신 찰치우틀리쿠에 비석,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1521년, 현무암, 안료,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뒷면>
앞면에는 괴물처럼 묘사된 대지의 입에서 물과 풍요의 신 찰치우틀리쿠에가 나타나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찰치우틀리쿠에는 우기 때 옥수수의 성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비석의 뒷면에는 비의 신 틀랄록의 조수들인 틀랄로케가 있는데, 이들은 물병을 깨트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비가 내릴 때 나는 천둥소리를 틀랄로케가 물병를 깨트린 소리라고 믿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의 자연과 사람들
아스테카는 다양한 민족과 4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도시국가들이 있었습니다. 도시국가들은 무역로와 시장으로 연결되었으며, 멕시코 전역의 물품과 문화를 유통하고 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각 도시국가에는 신전과 궁전, 시장이 있었고, 통치자인 틀라토니아와 귀족, 사제, 장인, 무역상, 평민, 노예 등이 함께 거주했습니다. 도시 외곽에 사는 농민들은 옷과 그릇, 생활용품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자연을 신성시하였고 동물과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제의용 달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파종과 수확에 가장 좋은 날을 결정하고 결혼을 하거나 긴 여행을 떠나는 등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벽면의 <멘도사 고문서>는 아스테카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고문서는 스페인이 건설한 식민지인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초대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의뢰하여 원주민이 그림 문자로 정교하게 작성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 사람들은 직접 식량을 생산하고 생활 도구 등은 스스로 만들어 사용했다. 남자는 농사 외에도 토기나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여자는 면화나 용설란의 섬유로 직물을 만들었다. 남는 직물은 시장에 내다 팔고, 귀족에게 공물로 납부했다.
<1. 거푸집,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1521년, 점토,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아스테카 사람들은 거푸집을 이용해 작은 인물상이나 신전 모형을 대량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작은 모형들을 장신구의 달개로 쓰거나 집 안의 제단을 꾸미는 데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머리장식을 한 신, 아스테카 1500년경, 점토,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무릎을 꿇고 머리에는 높이 솟은 깃털 장식을 단 이 여인은 쇼치케찰 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쇼치케찰은 성(性)과 다산뿐만 아니라 방적과 직조와 같이 여성들이 담당하였던 공예도 관장한 신입니다. 두 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달개로 쓰거나 집 안의 제단 위에 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 머리장식을 한 신, 아스테카 1500년 경, 점토,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거푸집으로 만든 이 여인상은 전통의상인 우이필(huipil) 상의와 몸에 감은 듯한 치마를 입고 두 팔을 들고 있습니다. 두 갈래로 나눈 깃털 머리 장식에 길게 늘어뜨린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착용했습니다. 다산과 어머니 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 여인,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여성을 묘사한 인물상에서 아스테카 전통 의상의 다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스테카가 다양한 종족의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토기,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상은 다산 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를 신에게 내보이는 어머니 또는 다산의 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 농부의 집은 다섯 채씩 단체로 지어서 가운데 둥근 정원을 두고 마주보게 했다. 한집에는 5~8명이 함께 살았다.집의 규모는 작았으며 요리, 식사, 실잣기, 옥수수 갈기 등 거의 대부분 활동은 집밖에서 이루어 졌다. 가난한 가정이라도 물항아리, 옥수수를 젹셔 놓는 사발, 요리용 평평한 판, 저장 항아리, 접시, 컵 등을 두고 있었다.
<1. 채색바리,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토기,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검은색과 주황색으로 장식한 그릇은 일상 생활에서 사용했습니다. 주로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생산되었고 시장을 통해 도시로 유통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복합무늬 도장, 아스테카 16세기 초, 점토,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아스테카의 도장 가운데 일부에는 여전히 붉은색 안료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도장은 거푸집으로 만들었으며 뒷면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대부분 나비가 있는 꽃, 새, 원숭이, 그리고 추상무늬 등을 새겼습니다. 이러한 도장은 몸, 옷감, 토기, 종이, 벽 등을 장식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 원숭이무늬 도장, 아스테카 1300~1521년, 점토,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몸이나 옷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4. 가락바퀴, 아스테카 추정 16세기 초, 점토,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실을 뽑고 직물을 짜는 것은 아스테카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성들은 시장에서 면화를 구해 이를 집에서 가공했습니다. 소녀들은 어릴 때부터 방직 기술을 배웠으며, 여성이 면직물을 많이 만들수록 가정은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면직물은 가장 중요한 공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스테카는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의 직물 생산을 강제로 늘리기도 했습니다. 테노츠티틀란의 귀족들에게 많은 양의 면직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 추상무늬 도장, 아스테카 추정, 16세기 초, 점토,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6.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의 모습입니다. 마름모꼴 무늬가 있는 치마를 몸에 감듯이 입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직물이 아스테카의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거푸집과 소조상, 술잔,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1521년, 점토,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거푸집을 이용해 같은 모양의 소조상과 토기를 대량으로 생산했습니다. 술잔에는 두개골이 장식되어 제의에서 폴케를 담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이를 안은 여인,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다산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여인들이 아이를 신에게 내보이며 출산에 대한 감사와 건강한 육아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귀걸이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채색접시, 아스테카, 1325 ~ 1521년경, 토기,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다리가 세 개 달린 접시입니다. 그중 한 점의 접시 안쪽에 ‘고문서 양식’의 꽃무늬 그려졌는데, 전문 예술가들이 장식한 고급 토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의 그림을 고문서뿐 아니라 토기, 석제 공예품, 벽화 등에도 폭넓게 사용했습니다. 40여 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 아스테카 사람들은 이러한 고문서 양식의 그림 문자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종이를 만드는 도구, 아스테카, 돌,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 원주민들은 무화과 나무껍질 등으로 만든 아마틀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무껍질 종이는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스테카에서는 주로 나무껍질 위에 회반죽을 발라 그림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구는 나무껍질을 두드려 펴는 데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가족
아스테카 경제의 기초 단위는 가족이었습니다. 소비할 식량을 생산하고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것을 스스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남성들은 농사 외에도 직접 토기나 가구를 만들고 집을 지었습니다. 여성들은 주로 면화나 용설란의 섬유로 직물을 짜는 일을 했습니다. 남는 직물은 시장에서 다른 것들과 교환하고, 귀족에게 공물로 납부했습니다. 그러나 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와 같이 제작이 복잡하고 귀한 물품은 전문 장인들이 제작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 사람들은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으며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상인들은 아스테카 사회에서 별도의 신분이었고 그들만의 공동체가 있었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신분이 상승될 수 없었다. 주요 거래품목으로는 농업생산물 뿐 아니라 개, 칠면조 등의 동물과 흑요석, 옷감 등이 있었다. 운하를 이용하는 카누가 주요 운송수단이었다.
<옥수수를 운반하는 사람, 아스테카, 10세기 ~ 1521년, 화산암,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몸을 앞으로 살작 굽힌 남자가 옥수수를 가득 실은 바구니를 등에 지고 있습니다. 옥수수는 콩, 호박과 더불어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의 주식이었습니다. 메소아케리에는 짐을 나르는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짐꾼이나 노예, 카누를 이용하여 물품을 운반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개, 아스테카 추정, 14세기 중반 ~ 1521년, 화산암, 독일 합부르크 로테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아스테카에서는 개를 주인의 영혼이 사후 세계로 떠날 때 함께 하는 동반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칠면조와 함께 식용으로 사육되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도끼날 화폐, 아스테카, 10세기 ~ 1521년, 구리,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멕시코 중앙고원의 시장에서는 물건을 직접 맞바꾸기도 했지만 면직물이나 카카오 씨앗, 구리로 만든 도끼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흑요석 몸돌, 중앙 멕시코, 흑요석, 독일 슈르트가르트 린덴박물관>
화산 유리인 흑요석은 메소아메리카에서 매우 중요한 광물이었습니다. 칼이나 화살촉과 같은 무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신구와 공구, 제의 용품 등을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시장과 상인
멕시코 중앙고원과 그 주변 지역은 상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각 도시마다 매주 시장이 열렸고, 이곳에서 다양한 물품들이 거래되었습니다. 시장에는 지역상인 외에도 장거리 무역상인 포츠테카도 드나들었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미국 남부와 과테말라까지 연결된 교통로로 금이나 열대 새 깃털과 같은 진귀한 물품을 유통시켰습니다. 또한 특화 시장이 있는 도시국가도 있었습니다. 오툼바는 흑요석 시장, 아콜마는 개 시장, 테스코코는 토기와 옷감 시장으로 유명했으며 톨라텔롤코에는 아스테카 최대의 상설시장이 있었습니다. 시장은 멕시코 전역의 다양한 구성원이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소, 라마와 같이 짐을 나르는 동물이 없었기에 모든 것은 짐꾼이 운반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모셨다. 도시에는 신전이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제를 올렸다. 귀족학교에서는 제의을 주관하는 사제를 육성했으며, 각 가정에도 제단을 두어 제의을 지냈으며 귀중한 물건들을 봉헌물로 바쳤다.
<피라미드 신전 모형, 아스테카, 16세기 초, 점토,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아스테카 사회에서 신전은 공동체의 중심지이자 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으며 묘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신전의 피라미드 구조는 신이 살았던 신성한 산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작은 신전 모형은 거푸집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 바람의 신 에에카틀-케찰코아틀,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입 위에 쓴 부리 모양의 마스크는 바람의 신 에에카틀의 형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바람의 신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농사에 필요한 비를 내리게 하는 중요한 신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바람의 신 에에카틀-케찰코아틀의 신전 모형,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
바람의 신 에에카틀-케찰코아틀 신전은 대부분 둥근 형태인데, 바람이 방해받지 않고 신전 주변을 자유롭게 돌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스테카의 중심 테노츠티틀란에는 신성 구역 외에도 도시 곳곳에 바람의 신을 위한 신전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 바람의 신 에에카틀-케찰코아틀,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4. 신전 모형,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토기,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거대한 피라미드 신전을 작게 만든 모형으로 집 안의 제단을 장식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 전쟁과 재생의 신 시페 토텍, 아스테카, 16세기초, 점토,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전쟁과 재생의 신 시페 토텍이 신전 위에 있는 모습입니다. 시페 토텍은 주로 입을 벌리고 희생된 사람의 살가죽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조각상도 입을 벌린 채 팔꿈치 부분에는 살가중의 두 손이 늘어져 있습니다. 집 안의 제단에 올리거나, 두 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달개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늙은 불의 신 우에우에테오틀-시우테쿠틀리,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현무암, 스위스 바젤 문화박물관>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고 눈에는 하얀색 물질로 채워졌으며 귓볼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매우 사실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늙은 불의 신’은 메소아메리카 문화권에서 널리 숭배되었으며, 항상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테오티우칸에서 다섯 번째 태양을 탄생시키기 위해 우에우에테오틀 신이 큰 불을 지폈고 나나우아친 신은 주저 없이 그곳에 몸을 던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토나티우, 태양의 신><믹틀란테쿠틀리, 죽음과 지하세계의 신>
<틀랄록, 비의 신>
<미스코아틀, 은하수와 사냥의 신>
<마쿠일쇼치틀, 놀이와 도박의 신><틀리솔테오틀, 욕망 고해 정화의 신>
<신테오틀, 옥수수의 신 가운데 남성 신>
신과 함께 하는 삶
아스테카 사람들은 신성하고 다양한 힘을 가진 수많은 신을 모셨습니다. 도시에는 각 신들을 모신 신전이 있었으며, 주기적으로 제의를 올려 인간과 신, 세상의 조화로운 삶을 기원했습니다. 귀족학교인 칼메칵에서는 대교모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들을 육성했으며, 각 가정에도 제단을 두어 신들의 영험한 힘을 기원하는 제의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토기와 같은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어, 이러한 물건들을 귀하게 여기고 제의 때 봉헌물로 바쳤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아스테카의 음식문화
아스테카 사람들은 주로 옥수수, 콩, 호박, 고추, 아마란스 등을 먹었습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칠면조와 개를 사육하기도 했니다. 그중 옥수수는 그들의 주식이었습니다. 선인장 역시 아스테카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열매는 과일처럼 달았고, 줄기는 채소처럼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꽃봉오리와 잎을 잘라 달콤한 시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갓 채취한 용설란 수액은 맛이 상쾌하고 영양가가 높았습니다. 이것을 발효시킨 풀케는 주로 제의에 바쳐졌고 축제와 같은 특별한 날에만 마실 수 있었습니다. 카카오는 열대지방에서 공물이나 교역으로만 얻을 수 있는 매우 귀한 열매였습니다. 오직 왕과 귀족만이 이를 섭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주로 쇼콜라틀이라는 음료로 만들어 먹었는데, 여기에 바닐라, 꿀 등을 첨가했습니다. 평민들은 옥수수 음료 아톨레를 즐겨 마셨습니다. 옥수수와 고추 등 아스테카 사람들의 주식은 오늘날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식재료가 되었습니다. 카카오, 초콜릿, 아보카도, 토마토, 칠리, 치아시드 등의 이름은 아스테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아스테카 제국의 확장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경제는 정복한 부족에서 받는 공물에 의지했다. 그들은 신들이 세계를 분열되지 않고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피의 제물을 원한다고 믿었다. 군대에는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로 불리는 높은 계급이 있었으며 전쟁에서 많은 포로를 잡은 군인만이 이 계급에 오를 수 있었다.
<전사모양 기둥, 아스테카, 1500년경, 돌,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톨테카 양식으로 만든 이 전사는 가슴에 나비 장식을 달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전사의 영혼으로 여겼던 제왕나비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아스테카의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 근처에서 같은 조각상 다섯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주의 네 기본 방위와 그 중심에 있는 우주의 중심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독수리 전사, 복제품, 진품은 1450 ~ 1502년, 점토, 멕시코 템플마요르박물관>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하는 독수리 복장을 한 인물로, 템플로 마요르 북쪽의 ‘독수리의 집’에서 발견했습니다. 아스테카의 ‘독수리 전사’계급도 이와 비슷한 의상을 입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전사의 계급
전쟁이 중요한 가치였던 아스테카 사회에서 가장 빨리 출세하는 방법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전사들은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으며 복장, 장비, 머리 모양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고위 전사 계급이 되기 위해서는 신전 제의 때 바칠 포로를 많이 생포해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전사 계급은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였습니다. 이들은 테노츠티틀란의 중심부에 위치한 신성구역에 거주했으며, 귀족과 같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정복 전략
아스테카는 다른 도시국가를 정복한 후 신전은 불태우고 그들이 모시는 신상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그들의 승리와 지배를 공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또한 신전에 보관된 무기들도 전리품으로 챙겼습니다. 아스테카는 정복한 도시국가를 두 가지 방식으로 다스렸습니다. 대형 시장이나 주요 교역로에 위치한 도시국가에는 많은 공물을 부과했습니다. 이에 반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도시국가에는 국경 수비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스스로 항복하는 도시국가의 통치자는 아스테카의 귀족으로 포섭했습니다. 그러나 틀라스칼라와 같은 몇몇 도시국가들은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된 도시국가로 남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공물 목록
<멘도사 고문서>의 공물 목록에서 아스테카 사회의 공물시스템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물은 3개월, 6개월, 또는 1년 주기로 정기적으로 거두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아스테카 통치자의 즉위식이나 장례식, 사원의 증축 등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경우에는 공물을 추가로 부과했습니다. 공물시스템은 먼 거리의 정복 도시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며, 아스테카 번영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다한 공물의 부과는 정복 도시국가의 불만과 저항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 코요테 또는 어린 늑대,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돌,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아스테카의 고위 전사 계급에는 ‘코요테 전사’가 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그동안 전쟁과 파괴의 신 테스카틀리포카와 연관된 ‘깃털 달린 코요테’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템플로 마요르 발굴조사에서 늑대 27마리가 포함된 봉헌물 상자가 발견되어 이 조각상이 어린 늑대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늑대는 가장 빈번하게 제물로 바친 포유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재규어,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현무암, 스위스 바젤 문화박물관>
엎드려 있는 재규어를 표현한 조각상입니다. 금속 공구가 없는 아스테카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만든 훌륭한 조각품입니다. 용맹한 재규어는 주로 통치자나 전사를 상징하며, ‘재규어 전사’계급도 있었습니다. 재규어 가죽은 가장 인기 있는 공물 가운데 하나였으며, 아스테카 통치자의 궁전과 왕 등에만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 독수리 전사, 아스테카, 14세기 중반 ~ 1521년, 점토, 벨기에 왕립예술역사박물관>
아스테카의 전사 계급 가운데 독수리 전사가 있었습니다. 평민도 전쟁에서 포로를 많이 잡으면 독수리 전사와 같은 높은 전사 계급이 될 수 있었으며, 귀족들이 독점하였던 특권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 칼, 아스테카, 1500년경, 부싯돌.흑요석,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텍파틀이라고 불리는 날카로운 타원형의 돌칼은 주로 희생제의 때 사용했습니다. 일부 텍파틀에는 얼굴 모양을 그리거나 모자이크로 장식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칼에도 생명을 불어 넣었으며, 의인화된 칼이 마치 희생된 제물을 물고 그 피를 마시는 것처럼 연출했습니다. 이러한 칼은 두개골에 꽂힌 채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고문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 흑요석 창끝과 화살촉, 아스테카, 1500년경, 흑요석,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유리질 화산암인 흑요석은 날카롭고 표면에 광택이 있어 메소아메리카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녔습니다. 흑요석이 각지에서 거래되고 가공되었으며, 흑요석 광산을 관리하는 것은 경제.정치.종교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흑요석 생산지에서 직접 완제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몸돌 그 자체를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타격, 연마, 눌러떼기 기법으로 날카로운 화살촉과 마쿠아우이틀 검의 날, 긁개, 손잡이가 달린 제의용 검, 바늘 등을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6. 마쿠아우이틀 검, 2019년 멕시코의 호르헤 비르틴 니콜라스 살라사르가 재현>
이 흑요석 검은 고문서와 스페인 사람들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한 것 입니다. 이 검은 단번에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으며, 날이 망가졌을 경우 갈아 끼우기도 쉬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정복과 공물로 세운 아스테카
전쟁은 아스테카의 정치.경제.사회.제의에서 가장 중요했습니다. 북쪽에서 온 이주민이었던 아스테카는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테스코코, 틀라코판이라는 도시국가와 함께 삼각동맹을 맺어, 멕시코 중앙고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대신 많은 양의 공물을 요구했습니다. 정복지에서 받은 공물은 아스테카에 번영을 가져왔고, 새로운 정복 전쟁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협상이 실패했을 때는 군대가 행동에 나서 정복지를 파괴했습니다. 아스테카 사회는 크게 평민과 귀족의 두 계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평민도 전쟁에서 뛰어난 공훈을 세우면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적군을 생호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포로들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성스러운 제의 때 희생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중의 전사자와 제의에서 희생된 이들이 하늘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한 여성 역시 이들과 함께 하늘의 세계로 간다고 여겼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 ‘아즈텍 문명’, 위키백과, 2023년
- ‘멕시코’,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