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부 관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구한말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수군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도서가 약탈되었다. 이후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에 방치되어 있다가 여러차례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그 내용이 확인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영구임대형식으로 국내로 반환되었다. 외규장각 의궤에는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과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외규장각 의궤가 국내로 돌아온지 10년 된 기념로 특별전 <외규장각과 의궤>를 개최하였다. 의궤는 조선시대 중요 국가 행사의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예법으로 왕조의 정통을 세우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의도가 의궤에 담겨 있다.

<어보를 담는 외함 보록(寶盝), 조선>

<외규장각의 관리 대장, <외규장각형지안>, 1856년(철종7), 1책(48장)>

1856년(철종7) 11월에 작성한 강화도 외규장각의 형지안(形止案)입니다. ‘형지안’이란 지금의 관리 대장과 같은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외규장각의 내부 구조와 물품의 보관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중앙 안쪽에 3층의 봉안장이 있었고, 여기에 왕과 왕실 구성원들이 책봉될 때 받은 옥책, 금보, 교명(敎命)을 보관하였습니다. 왕실의 위상을 직접 상징하는 가장 귀한 의물(儀物)입니다. 나머지 공간에는 탁자들을 배치했는데, 그 위에 각종 서적이나 족자를 올려두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 것이 의궤입니다. 1856년 형지안 1책에서 확인되는 의궤만도 430여 책에 달합니다. 왕실의 가장 귀한 물건들과 함께 보관할 만큼, 의궤는 귀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어보를 담는 외함 보록(寶盝), 조선>

<철인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며 만든 옥책, 대한제국 1908년, 옥>

옥책(玉冊)은 왕비를 책봉하거나, 왕과 왕비.왕대비.대왕대비 등에게 덕을 높이 기리는 칭호(존호) 등을 올릴 때 그 내용을 옥에 새겨 첩으로 엮어 만든 것입니다. 1856년의 <외규장각형지안>을 보면 대왕대비였던 순조의 비 순원왕후와 왕대비였던 익종(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의 옥책 여러 건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전시된 옥책은 1908년에 만든 철종의 비 철인왕후에게 존호를 올릴 때 만든 것으으로 외규장각에 보관하던 것은 아니지만, 순원왕후나 신정왕후의 옥책도 이와 같은 형태였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정조의 글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인쇄본), 1814년(순조 14), 수원화성박물관>

<조선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 조선>


<명나라 숭정황제의 글씨 탑본, 조선, 경기도박물관>

외규장각 중앙 봉안장의 옆 탁자에는 명나라 숭정황제의 글씨를 탑본한 족자가 9점 놓여 있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을 때 군대를 파견해 준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를 높이 기렸고, 사대부들은 숭정황제의 글씨를 탑본이난 첩으로 만들어 소장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사(思無邪)’라고 쓴 이 글씨는 공자가 고대 중국의 시를 모은 경전 <시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꼽은 것입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흑칠 함, 조선, 나무에 칠>

<주칠함, 조선후기, 나무에 칠>

외규장각과 의궤
여러분은 지금 외규장각 안에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왕실의 상징인 금보(金寶)와 옥책(玉冊), 선왕의 보배 같은 글귀와 유구한 역사를 담은 왕실 족보 등. 조선의 정체성이자 왕조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이 의궤(儀軌)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외규장각 의궤’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외규장각은 한강이 끝나는 바다 위 강화도에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와 왕실의 안전을 지켜주는 ‘보장지처’였습니다. 가장 안전한 땅에 특별히 건물을 지어서 보관할 만큼, 외규장각 의궤는 귀한 책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특별했기에, 어떤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처럼 귀하게 보관했던 것인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 행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는 3부에서 9부까지 발행하였다. 현재까지 총 608종이 남아 있는데 그중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내용이 35% 정도이며, 서적의 편찬과수정에 관한 내용(17%), 공덕을 드러내는 존호와 관련된 내용(10%), 왕실 건물의 건축과 수리와 관련낸 내용(9%) 등이 포함되어있다. 현재 의궤의 주요 소장처로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소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이다.

<어람용 헌종국장도감의궤(1), 1850년(철종1) 1책(176장)>

<분상용 헌종국장도감의궤(1), 1850년(철종1), 1책(176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어람(御覽)의 품격
일국을 경영하는 왕의 권위가 자극하듯이, 왕의 손길이 닿는 어람용 의궤 또한 그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또한 후세의 왕들에게 대대로 전해야 했기에 국격도 상징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람용 의궤는 일반 서책에서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장황(粧䌙) 방법을 썼습니다. 최상의 재료만 모아서 가장 뛰어난 솜씨의 장인이 조선만의 미으식으로 완성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람용 의궤는 일반적인 서책과는 다른 격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눈길을 사로잡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화려함, 일부러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 이것이 바로 ‘어람’의 품격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어람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하), 1725년(영조1) 1책(164장)>

<분상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1725년(영조1), 1책(189장)>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어람용 의궤는 최상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전문가가 만들었습니다. 은은하게 품위가배어나는 비단 표지와 반짝반짝 빛나는 놋쇠 장식, 깨끗하고 윤기가 나는 고급 종이에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쓴 글자, 섬세한 솜씨로 그려 넣은 그림까지, 어느 하나 평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습니다. 분상용 의궤는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책입니다. 중요한 국가 행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종이로 표지를 만들고 실로 묶는 일반적인 서책보다 격을 높였지만, 튼튼한 삼베로 표지를 만들고 화려한 장식은 생략하여 실용성을 높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1.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윈원황후존숭도감의궤(상) 책의, 1713년(숙종39)><2.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1) 책의, 1832년(영조8)>

1. 숙종인경왕후인현왕후윈원황후존숭도감의궤(상) 책의, 1713년(숙종39)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초에 만든 어람용 의궤는 주로 구름무늬와 보배무늬가 어우러진 구름보배무늬의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1) 책의, 1832년(영조8)
18세기 전반에는 어람용 의궤의 표지로 커다란 연꽃과 넝쿨이 표현된 연꽃넝쿨무늬 초록색 비단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3.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하) 책의, 1837년(헌종 3)><4.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 책의, 1674년(현종 15)>

3.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하) 책의, 1837년(헌종 3)
18세기 중반부터는 무늬가 없는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4.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 책의, 1674년(현종 15)
보통의 초록색 비단 표지와 달리 푸른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습니다. 무늬는 구름무늬가 중심이 되고 사이사이에 보배무늬가 들어간 구름보배무늬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5. 인조인열왕후부묘도감의궤(2), 1651년(효종2)>

18세기 초까지 어람용 의궤의 놋쇠 변철에는 별다른 무늬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6. 순원왕후상호도감의궤, 1841년(헌종7), 1책(178장)><7. 효순현빈묘소도감의궤(하), 1792년(영조28)>

6. 순원왕후상호도감의궤, 1841년(헌종7), 1책(178장)
18세기 중엽부터는 변철에 연꽃덩쿨무늬 또는 넝쿨무늬를 새겼습니다. 구부러진 줄기와 잎 사이 빈 공간은 정으로 쪼아서 작은 점무늬를 채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 효순현빈묘소도감의궤(하), 1792년(영조28)
변철에 악기, 약병, 부채 등 여러 가지 화려한 기물의 형상을 넣었습니다. 이러한 무늬를 ‘보배무니’라고 합니다. 보배무늬를 넣은 변철은 1752년(영조 28)에 제작한 어람용 의궤에서만 확인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어람용 의궤의 장황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푸른색 비단이나 염색하지 않은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비단에 들어간 무늬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구름무늬입니다. 화려한 연꽃넝쿨무늬가 표현된 비단도 많이 썼습니다. 풍성한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큼직한 연꽃봉오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구름이나 연꽃 사이사이 반짝이는 보배무늬가 들어간 비단도 보입니다. 영조 때에는 왕실이 앞장서서 검소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때 만든 의궤는 별다른 무늬가 없는 비단을 사용하여 단아한 멋을 살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표지와 내지를 묶을 때 쓰는 금속인 변철(邊鐵)은 처음에 문양이 없는 놋쇠 판을 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다양한 문양을 새겼습니다. 가장 많은 것은 넝쿨무늬입니다. 유연하게 휘어진 줄기와 잎사귀, 활짝 핀 연꽃을 가득 새기고 여백에는 작은 점을 채웠습니다. 영조 때 만든 의궤 중에는 꽃송이 사이에 마름모꼴의 보배무늬를 넣어서 영화로움을 더한 변철도 있습니다. 변철 위에 박은 못은 국화동으로 장식했습니다. 빗금으로 꽃술을 표현하고 그 주위에 8장의 꽃잎이 둘러싼 모양, 꽃잎을 2겹으로 만들어서 화사함을 더한 모양 등 다양합니다. 작은 못 하나까지 아름답게 장식한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의소세손책례도감의궤, 1751년(영조27), 1책(221장)>

1751년(영조 27)에 의소세손을 왕세손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맏아들로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원손’으로 불렸습니다. 원손을 크게 아낀 영조는 바로 이듬해에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의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지금 보는 면은 왕세손 책봉 때 수여하는 죽책의 제작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크기가 일정한 대나무쪽을 5개씩 한 첩으로 묶어서 만든다고 적었습니다. 대죽 2통, 초주지(고급한지) 반장 등 제작에 사용한 각종 재료의 이름과 수량도 꼼꼼하게 적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상), 1752년(영조28), 1책(111장)>

1752년(영조28) 영조의 맏손자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묘소를 조성하면서 만든 의궤입니다. 지금 보는 면은 담당 관청인 묘소도감에서 호조와 강원감영 춘천부에 보낸 공문서입니다. 묘소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호조에는 정철(正鐵, 쇠)를 보내달라고 하였고, 춘천부에는 소나무 150그루 등 목재를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의소세손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데에다 세손의장례는 3개월 만에 치러야 했기 때문에 매우 시급하다며 재촉하는 내용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상), 1752년(영조28), 1책(207장)>

1752년(영조28) 영조의 맏손자 의소세손의 장례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입니다. 상권 마지막에는 의소세손의 관과 시책, 부장품과 각종 제사 물품을 싣고 묘소로 가는 발인 행렬을 그린 반차도가 28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반차도에 비해 인물 및 기물의 형태와 색채가 선명하여 완성도가 높습니다. 모든 인물과 물품들을 일일이 손으로 그린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이목구비와 옷주름, 각기 다른 자세까지 정교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단 하나의 책, 외규장각 의궤 유일본
의궤는 한번에 3부~9부를 만들었지만 지금 단 한 부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의궤를 ‘유일본’이라고 합니다.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유일본 의궤가 29책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유일본 중에 의소세손의 장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와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입니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의 첫번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의 큰 사랑을 받아 태어나고 얼마 후 왕세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세손의 장례는 이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의식 절차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장례 복식과 각종 물품 등의 격식을 왕세자보다 낮추고 세자빈보다는 높여서 왕세손의 지위를 명확하게 설정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모두 이 의궤들에 감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세손의 장례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의궤에 보이는 화원
의궤에는 조선시대 화원의 이름도 여럿 보입니다.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린 전문가들입니다. 행사에 사용하는 각종 회화작품을 그리거나, 행렬 연습을 위한 배치도 또한 의궤에 실린 크고 작은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표기하지 않아서 의궤 속 그림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기는 어렵습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상)><발인반차도>처럼 그린 사람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의궤에는 반차도 제작을 담당한 부서의 화원으로 김덕성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김덕성은 사람을 그릴 때 역동적이고 힘찬 표현을 잘했는데, 이 <발인반차도>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보입니다. 조선시대 반차도는 일정한 형식과 구성으로 그리는 것이지만, 그속에서도 화원 개인의 실력과 개성이 묻어남을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희빈중궁전책례도감의궤, 1690년(숙종16), 1책(214장)>

1690년(숙종16)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희빈 장씨는 중인 집안 출신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습니다. 1688년(숙종 14)에 왕자를 낳아 희빈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이때이 왕비 책봉 의식 절차, 의식의 준비 및 진행 과정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이 의궤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는 면은 왕비 책봉 때 하사한 금보와 옥책 등 의물 제작 내용을 적은 부분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영조왕세제책례도감의궤(상), 1721년(경종1), 1책(138장)>

1721년(경종1)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지금 보는 면은 책례도감의 하위 기구 중 하나인 일방의 관원 명단입니다. 일방에서는 왕세제 책례 때 수여하는 교명, 죽책, 면복 등의 제작을 담당하였는데, 품목마다 직책과 이름을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업무분장이 매우 확실하였던 같습니다.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1721년 후사가 없던 이복형 경종에 의해 왕세제로 책봉되었습니다. 얼마 후 경종이 결국 병으로 승하하자 1724년 왕위에 올라 조선 제21대 왕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하), 1762년(영조 38), 1책(136장)>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묘소를 조성하면서 만든 의궤입니다. 묘소 조성을 총괄한 묘소도감의 업무내용이 수록되었습니다. 묘역에 건물을 짓거나, 각종 철물을 제작하거나, 석재를 다듬는 등 능을 조성할 때 필요한 작업들입니다. 지금 보는 면은 장례 기간 동안 제사를 담당한 관청인 혼궁도감에서 보낸 공문서입니다. 묘소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도록 제상과 병풍 등 몇몇 기물을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왕실 장례에서 필요한 기물을 매번 새로 만들지 않고, 다른 관청에 보관허던 것들을 재사용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하나하나 상세하게
역사기록물로서 조선왕조의궤의 가장 독보적인 가치는 내용의 상세함에 있습니다. 행사나 의례가 끝난 후 실무를 담당했던 도감에서 생산했거나 다른 관청으로부터 받은 공문서를 모아 그대로 베껴 엮었기 때문에 일의 준비와 진행 내용을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행사를 설명하는 기록으로는 가장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의궤 기록의 상세함은 실무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습니다. 행사의 추진 배경과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진 의사결정 내용 등 일이 진행되어 가는 맥락도 설명하였습니다. 실록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 궁궐 건축이나 수리 같은 분야도 포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의궤는 하나의 행사를 진행할 때 참고하는 단순한 결과보고서의 수준을 넘어서 주요 사업의 추진 원리와 지향점을 보여주는 국가 경영 지침서인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헌종실록, 1851년(철종2) 간행>

1834년 11월부터 1849년 6월까지 헌종 재위 기간의 일을 수록한 실록입니다. 권제 13 헌종 12년(1846) 1월 26일 기사에 효명세자의 무덤 수릉의 이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보입니다. 헌종이 대신들에게 수릉을 옮기고 싶다고 하자 영부사 조인영 등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없어지고,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것만 가까스로 전란을 피했습니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추가로 인쇄하여 새로 건립한 사고에 분산시키고,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보관하였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정족산사고본입니다. 지금 전시되 실록은 전주시에서 정족산사고본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 인쇄기굴로 다시 펴낸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 1846년(헌종12) 7책 중 2책(131장, 103장)>

1846년(헌종 12) 양주 천장산에 있던 효명세자의 묘 수릉을 용마봉 아래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첫번째 책 앞머리에 수릉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헌종과 신료들 사이에 오고간 구체적인 내용을 수록하였습니다. 헌종이 처음 수릉 이전을 제안하자 신하들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는 내용은 실록의 기록과 동일합니다. 이후 헌종과 신하들이 여러 차례 만나 논의하고, 2차례에 걸쳐 수릉에 가서 풍수 형국을 살펴본 사실이 날짜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왕릉 이전을 위한 논의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재위 1834~1849)은 성인이 된 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효명세자의 묘 수릉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이에 헌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전을 제안합니다. 왕릉을 옮기는 것은 많은 인력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행에 옮길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헌종실록>에는 이 부분이 매우 짧게 언급되어 있어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이때 만든 의궤는 2종 9책이나 되어서 상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날짜별로 정리된 기록을 따라가면, 헌종과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며칠에 걸쳐 토의하고 또 2차례 현장 확인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왕과 신하들이 의견을 조율해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명세자의 어린 시절 글씨, 1819년, 종이에 먹>

효명세자가 11세 때 쓴 글씨로 만든 첩입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박영원에게 써서 내려준 것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자는 장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명세자에게 존호를 올리며 만든 옥책의 탑본, 대한제국, 종이에 먹>

1902년 고종황제가 자신의 양아버지인 효명세자와 그의 비 신정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옥책의 탑본입니다. 고종은 1899년에 익종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시호를 ‘문조익황제’, 신정왕후의 시호를 ‘신정익황후’라고 하였는데, 이때 익종에게 ‘굉유신휘수서우복’이라는 존호를, 신정왕후에게 ‘계지’라는 존호를 다시 올린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숙종실록, 1728년 간행>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 기간의 일을 기록한 <숙종실록>입니다. 권제25 숙종 19년 3월 23일 정묘일에 경덕궁(경희궁)과 관련된 기사가 보입니다. 경덕궁 수리 중 땅속에서 인골이 발견되자 숙종이 잘 수습하여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숙종실록>에는 1693년 3월부터 7월까지 진행된 경덕궁 보수 공사 관련 언급이 4건 수록되었는데, 그중 첫번째 기사입니다. <숙종실록>은 1720년 11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1728년 3월에 완성하였습니다. 전시품은 임잰왜란 당시 유일하게 전란을 피한 전주사고본(정족산사고본)을 바탕으로 하여 전주시에서 현대 인쇄기술을 활용하여 다시 펴낸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경덕궁수리소의궤, 1693년, 1책(79장)>

1693년(숙종19)에 추진한 경덕궁의 보수공사 내용의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입니다. 분상용 의궤가 전하지 않는 유일본입니다. 이 의궤는 공사 담당 관청인 수리소가 설치된 1693년 3월부터 공사가 끝난 7월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수리소 설치 이전에 이미 공사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덕궁이 처음 건립된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를 거쳐 현종대에 이르는 동안 훼손된 전각들을 포함하여 40여 채의 건물에 대한 수리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어서 경덕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서궐도안,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고려대학교박물관, 보물>

지금의 경희궁 전경을 그린 초본입니다.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경희궁의 여러 전각과 주변 언덕의 자연 경관을 담았습니다. 경희궁은 1620년에 건립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불렀고, 별칭으로 ‘서궐(西闕)’이라고 했습니다. 1693년에 쇠락한 건물들을 전반적으로 수리하였고, 1829년에 큰 불이 나자 이듬해부터 2년에 걸쳐 주요 전각들을 새로 지었습니다. 두 차례의 공사 내용이 <경덕궁수리소의궤>와 <서궐영건도감의구>로 남아 있습니다. <서궐도안>은 숙종 때의 공사와 순조 때의 공사 사이 기간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궁궐 전체 규모와 구체적인 전각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위의 두 의궤와 이 <서궐도안>을 통해서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조선시대 공사 현장의 품삯은 얼마였을까?
영건의궤(營建儀軌)에는 건축 공사에 참여한 여러 기술자와 일꾼의 품삯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장인’이라고 불린 기술자로 나무를 다듬는 목수, 나무 부재나 장식을 만드는 조각장, 돌을 다듬거나 쌓는 석수, 지붕에 기와를 얹는 개장, 건물 안팎에 단청을 칠하는 칠장 등이 있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꾼 모군들은 짐을 나르고, 흙을 다지고, 매끼 식사를 준비하고, 장인들의 조수 역할을 했습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는 한 달 단위로 쌀고 포목(베, 무명)을 지급했습니다. 장인들은 분야에 관계없이 쌀 9말과 포2필을 받았는데, 단순한 잡역을 담당한 모근들도 동일한 액수를 받거나 떄로는 장인보다 더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중엽부터는 일을 한 날 수에 따라 품삯을 계산해서 돈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문 기술인 장인들이 일반 일꾼인 모군들보다 휠씬 많은 액수를 받게 되었고, 장인들 사이에서도 일이 많은 분야와 상대적으로 적은 분야의 품삯이 달라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1824년, 1책(154장)>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을 짓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내용 중에 <장료식>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품삯 내역입니다. 이 시기에는 장인들의 품삯이 일반 일꾼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장인들 사이에서도 기술 분야 및 일의 양에 따라 지급받는 액수가 달랐습니다. 18세기 후반들어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전문 기술자인 장인들도 적절한 대가를받고 일을 하게 되었고, 일반 일꾼들은 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임금 수준이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남별전중건청의궤, 1677년, 1책(109장)>

태조.세조.숙종.용조.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인 남별전을 고쳐 지을 때 작성한 의궤입니다. <미포상하식>이라는 항목에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품삯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목수, 조각장, 석수 등 전문 기술자인 장인들은 한 달에 쌀 9말을 받았는데, 단순 일꾼들도 똑같이 9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가에서 관리한 장인들은 의무적으로 동원되었던 것과 달리 단순 일꾼들은 돈을 주고 모집하였기 때문에 일을 하려는 사람이 적을 때에는 기술자만큼이나 많은 돌을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궁궐 건축의 모든 것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건축공사와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궁궐이나 종묘, 왕실 사당을 새로 짓거나 수리한 일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이런 의궤를 통틀어서 ‘영건의궤’라고 부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영건의궤는 특별한 건물이거나 규모가 매우 큰 공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숙종 때에 전반적으로 수리하고, 순조 때에 대대적으로 재건축한 경희궁 같은 경우입니다. 당시 의궤를 펼쳐보면 공사 배경부터 건물별 수리 내용, 사용한 자재의 종류와 수량, 공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지급받은 품삯까지 조선시대 궁궐 건축의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의 정면 모습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궐건축 문화를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헌경혜빈양례도감의궤(3), 1816년, 1책(143장)>

1815년 혜경궁으로 더 잘 알려진 혜빈 홍씨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전체 4책 중 세번째 책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기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원소(묘소)에서 제사 지낼 때 쓸 것과 신주를 모시는 혼궁에서 사용할 것 두 부류를 제작하였는데, 과자류와 과일류를 담는 우리와 촉대.향로 등 총 133건의 명칭과 수량, 재질, 크기, 무게를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기마다 그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채색한 도설을 바로 옆에 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산자우리>

<종자우리>

산자우리와 종자우리, 조선 20세기, 황동
우리(于里)는 다식이나 약과 등을 높이 쌓을 수 있도록 고정시키는 틀입니다. 위.아래가 뚫린 원통형이고, 옆면은 8개의 기둥 사이를 뚫어서 내용물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윗부분에는 어떤 음식을 담았는지 이름을 새기기도 합니다. 종자우리는 작은 과일을 올려 놓을 때 쓰는 제기입니다. 산자우리와 달리 옆면이 막혀 있는 원통형입니다. 산자우리와 종자우리는 받침 위에 올려서 사용합니다. 이때 사용하는 받침은 바닥이 평평하고 낮은 원형 굽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향로.향합, 조선 20세기, 황동>

향을 피우면 신이 여기에 감응하여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에서는 항상 향을 피우는 그릇인 향로와 향을 담은 향합을 준비합니다. 의궤 속 제기도설에 보이는 향로는 여러 가지 모습이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은 뚜껑에 용머리가 있는 것입니다. 뚜껑에 있는 용은 왕실의 상징입니다. 정상에서 머리를 치켜 세우고 뚜껑 전체로 몸을 휘감은 모습입니다. 몸체는 크고 둥근 그릇에 세 개의 다리가 달린 형태이며 잘록한 목에는 번개문양을 두르고 길게 뻗은 두 귀에는 봉황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향합은 뚜껑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납작한 원형입니다. 제기도설에 보이는 향합은 뚜껑 윗면에 몇 개의 굵은선을 두른 것이 대부분이데, 가끔 번개문양을 넣은 경우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촛대, 조선 20세기, 황동>

제사 떄에 초를 꽂기 위해 사용한 촛대입니다. 제상 남쪽 양 끝에 한 쌍을, 술 따르는 그릇을 올리는 준소상에 한개를 배치하였습니다. 왕실 제사에서 사용한 촛대는 원뿔 형태의 받침 위에 돌출된 마디를이 연이어 있는 긴 기둥을 세우고, 위쪽 끝에 둥근 촛물받이와 뾰족한 초꽂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형태를 설명하는 도설(圖說)
의궤 속 그림 중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 구조, 행사 때 사용한 물건의 형태 등을 그린 것을 도설이라고 합니다. 설명하려는 대상의 기본적인 생김새뿐만 아니라 비례감, 색감, 전반적인 분위기까지 글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에서 도설이 포함된 의궤는 172책(약 60%)입니다. 그중 대략 70%에 해당하는 115책이 왕실 장례식과 관련된 의궤들입니다. 기간이 길고 매우 복잡한 장례를 차질 없이 치르기 위해서 명확하고 상세한 규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만큼 도설도 많이 수록하였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3), 1821년, 1책(134장)>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 김씨의 장례에 관해 기록한 의궤입니다. 총 4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중 세번째 책에 각종 제사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안 제기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기마다 명칭과 수량, 재질, 크기, 무게를 적고, 바로 옆에 제기의 모습을 그린 채색도설도 수록하였습니다. 신주를 모시는 혼궁에서 사용한 제기 중 가장 먼저 수록한 것은 술항아리인 희준(犧尊)과 상준(象尊)입니다. 소와 코끼리 모습을 본뜬 그릇의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산뢰(山罍), 조선 20세기, 황동>

산과 구름, 우레 문양을 넣은 술항아리입니다. 각종 제사 때 술 따르는 용기들을 올려놓는 준소상(樽所床)에 한 쌍을 진열한 후 한 쪽에는 맑은 물, 다른 한 쪽에는 맑은 술을 담았습니다. 몸체에 굵은 띠를 둘러 구획한 후 우레, 구름 낀 산봉우리, 삼각형 문양을 넣은 모습입니다. 우레와 구름은 왕의 은덕이 우레나 구름처럼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의미입니다. 산뢰에 담긴 물과 술은 표주박 모양의 긴 국자로 뜹니다. 손잡이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어서 ‘용작(龍勺)’이라고 합니다. 술항아리 하나마다 용작 하나씩을 갖추는 것이 정식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희준>

<상준>

희준과 상준, 조선 18세기, 황동
희준(犧尊)은 소의 모습을 본뜬 술항아리이고, 상준(象尊)은 코끼리의 모습을 본뜬 술항아리입니다. 제사 때 술 따르는 용기들을 올려놓는 준소상에 한쌍씩 올려놓고 한 쪽에는 맑은 물, 다른 한 쪽에는 제사용 술을 담았습니다. 등에 얹은 뚜껑을 열고 소와 코끼리 모양의 몸통에 술을 담는 방식입니다. 이 희준과 상준의 배 부위와 뚜껑 안쪽에는 ‘문희묘’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문희묘에서 사용한 제기라는 표시입니다. 문희묘는 문효세자를 제사지내던 사당입니다. 정조의 맏아들로 출생 이듬해에 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5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제사용 그릇 제기
조선시대 왕실 제사는 조상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 대대로 내려온 왕위의 정통성을 지금의 국왕이 이어받았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의례입니다. 그래서 제사에서는 절차와 형식은 물론 사용하는 물품 하나까지도 왕실의 위상과 예법에 걸맞는 법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 때 쓰는 그릇인 제기는 의궤에 각각의 명칭과 수량, 재질, 크기를 적고 그 옆에 완성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다음에 제기를 만들 떄 참고하여서 크기나 모양이 달라지지 않도록 한 조선시대 방식의 표준화 지침인 것입니다. 덕분에 의궤 속 도설과 똑같은 모습을 한 왕실제기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하), 1843년, 1책(252장)>

1843년 헌종의 비 효현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묘소 경릉을 조성한 일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하권 첫머리에 찬궁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찬궁은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을 매장하기 전 임시로 모셔둘 때 사용한 집 모양의 구조물입니다. 지금 보는 도설 속의 찬궁은 왕릉의 부속 건물인 정자각에 설치했던 것으로 나무로 골격과 벽체를 세우고 죽망으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내부 사방 벽에는 종이를 바른 후 방위에 맞추어 청룡.백호.주작.현무를 그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하), 1849년, 1책(233장)>

1849년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승하하자 이보다 앞서 세상을 뜬 왕비 효현왕후의 묘소 바로 옆에 능을 조성하면서 만든 의궤입니다. 상.하 2책 중 하책에 찬궁에 그려 붙였던 사수도 도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는 장면은 사수도 중 청룡의 도설입니다. 발톱이 5개의 오조룡으로 신성함을 상징하는 불꽃무늬 화염문을 두르고 몸을 S자형으로 틀어 날고 있습니다. 이전 시기의 ⊃자형에 비해 더 역동적으로 바뀐 모습입니다. 주변에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상), 1757년, 1책(146장)>

1757년 숙종의 세번째 비 인원왕후 김씨의 묘소 조성에 관한 의궤입니다. 상.하 2책 중 상책 첫머리에 사수도 도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는 장면은 삿도 중 백호와 주작의 도설입니다. 이전 시기에 백호는 불꽃무늬인 화염문을 두른 신령한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화염이 사라진 채 산에서 어슬렁 걸어 나오는 호랑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가장 획기적으로 변한 것은 주작입니다. 머리와 다리가 3개인 삼수삼족의 봉황에서 하늘을 나는 붉은 새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헌경혜빈현륭원원소도감의궤(하), 1816, 1책(175장)>

1815년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로 더 잘 알려진 헌경혜빈이 흥서하자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합장하면서 제작한 의궤입니다. 상.하 2책 중 하책 첫머리에 사수도 도서리 수록되어있습니다. 지금 보는 장면의 사수도 중 북쪽을 수호하는 현무의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거북과 뱀이 뒤엉키 귀사합체 형상이었으나, 이 시기의 현무는 뱀이 사라지고 입에서 상서로운 기운인 영기를 뿜는 거북만 남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영조 때 왕실 상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사수도 도상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알려졌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왕의 관을 수호하는 사수도(四獸圖)
왕과 왕비의 관은 능에 묻기 전까지 찬궁이라고 하는 집모양의 구조물 안에 모셔두는데, 이떄 찬궁의안쪽 벽에 사수도를 그려 붙였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인 청룡.백호.주작.현무의 그림입니다. 하니만 장례의식이 끝나면 찬궁은 모두 불에 태워버리기 때문에 찬궁에 붙인 사수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오직 의궤에 실린 사수도 도설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종국장도감의궤(상.하), 1659년, 2책(293장.222장)>

1659년 5월에 승하한 효종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입니다. 장례를 주관하는 국장도감을 설치해서부터 5개월 뒤 시신을 묘소인 영릉으로 옮겨 장사지내고, 창경궁으로 돌아와 문정전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왕 장례 전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상책 마지막에 30면에 걸친 <발인반차도>가 수록되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빈전에 모시고 있던 효종의 혼백과 재궁을 모시고 묘소를 향해 가는 발인 행렬을 그린 것입니다. 선도 관원으로 시작해서 국왕의 평소 행차 때와 같은 구성의 길의장과 국왕 장례에서만 쓰는 의장인 흉의장, 그 뒤를 따르는 여러 관원들로 이루어진 모습닙니다. 지금 보는 면은 길의장의 주인공인 혼백거(魂帛車)가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돌아가신 왕의 영혼을 모시는 가마입니다. 하책에는 왕릉에 함께 묻기 위해 만든 부장품 내역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왕의 예복인 대례복입니다. 면류관과 구장복, 구장복 위에 두르는 붉은 치마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각의 명칭과 만드는 데에 들어간 재료의 양을 적고, 완성된 복식의 그림도 그렸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효종국장도감의궤(상.하), 1659년, 2책(293장.222장)>

행렬구성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
국가 의례나 왕실 행사에서 왕과 왕비, 여러 관원과 군인들이 줄을 지어 행차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과 깃발.가마 등 기물의 순서를 그린 것이 반차도입니다. 장중한 행차 의례를 실수 없이 진행하기 위해 사람과 기물의 위치를 미리 그려보고, 행사가 끝난 후에 정성껏 다시 그려서 의궤에 실었습니다. 행렬이 포함된 의례에서만 반차도를 그리기 때문에 외규장각 의궤 297책 중 반차도가 수록된 의궤는 60책(20%)에 불과합니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사람 한 명 한 명, 기물 하나한 손으로 그려서 채색하였습니다. 덕분에 조선시대 왕실 행렬의 생생한 현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국왕의 장례 그림 <발인반차도>
외규장각 의궤 반차도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발인반차도>입니다. 돌아가신 분의 관을 모시고 묘소까지 가는 행렬을 그린 것입니다. 효종의 <발인반차도>는 1659년 10월 28일 창덕궁을 출발한 발인 행렬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묘소 영릉까지 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돌아가신 왕의 혼백을 모신 가마와 재궁을 실은 가마가 중심에 서고 그 주위를 수많은 수천 명의 관원과 군인, 각종 깃발과 의장물이 에워쌌습니다. 효종대왕이 살아계실 떄의 권위와 선왕으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정조의 왕릉에 묻었던 명기, 1800년, 도자기 금속, 국립고궁박물관>

1800년 정조 장례 때 능에 같아 묻었던 명기입니다. 명기란 망자가 저승에서 사용하도록 그릇.장신구 등 각종 기물이나 노비.가축 등을 작게 만들어서 무덤에 넣어 주는 부장품입니다. 효종의 장례 때에는 제기 종류와 악기, 무기 등을 작게 만들어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조의 명기 구성과 일치하는 항목이 많아 주목됩니다. 효종의 능에 부장한 명기들도 이와 비슷한 크기 및 형태였을 것 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헌종의 혼례 축하 그림 병풍, 1844년, 비단에 색>

헌종이 효정왕후 홍씨와 혼례를 올린 후 이튿날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는 진하 의례 장면을 그렸습니다. 창덕궁 인정전 마당에 예복을 갖추어 입은 신하들이 엎드려 있습니다. 실제로는 경희궁 숭정전에서 거행되었지만, 행사의 경사스러움을 기념하려는 목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인정전을 배경으로 삼은 것입니다. 전각 안팎으로 용기.보검 등 의장과 왕이 타는 가마들이 보이고, 호마녀 아래 담장 너머로 큰 북 건고와 편경.편종 등 대형의 궁중 악기가 배치된 모습도 보입니다. 정전에서 거행된 국왕 혼례 의식의 성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궁궐로 들어가는 신부의 행차 그림, 18세기 후반, 종이에 색, 고려대학교박물관>

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신부의 행렬 그림입니다. 그림의 시작 부분 여백에 ‘궝궐 가는 행차 그림’이라는 의미로 ;예궐반차도’라고 제목을 써 넣었습니다. 교명 등 의물을 실은 가마와 수많은 관원들의 인도를 받는 신부의 가마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에 신랑 가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신부의 가마 위에 ;교’라고 쓴 것으로 보아 후궁인 빈(嬪)의 혼례 행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궁의 경우 신랑인 왕이 직접 맞으러 오는 친영례를 생략하고 혼자 궁궐로 이동하였으며, 왕비나 왕세자빈이 타는 ‘연’보다 한 단계 낮은 ‘교’를 탔습니다. 지위에 따라 혼례 예법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하), 1802년(순조2), 어람용>

1802년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 상.하 2책 중 하책입니다. 뒷부분에 66면에 걸친 채색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별궁에서 친영의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가는 왕과 왕비의 행차 모습을 그린 <친영반차도>입니다. 처음에는 <친영반차도>에 왕비의 가마 행렬만 그렸으나 영조 때 이후로는 왕의 가마도 등장합니다. 수많은 관리와 의장대, 호위 병력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행차하는 왕의 행차를 장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어서 왕비의 행차가 뒤따릅니다. 책봉 때 받은 교명과 옥책, 금보, 명복을 실은 가마를 앞세우고, 왕비는 큰 가마인 연(輦)을 탔습니다.

생생하게 그림으로
사람들은 의궤를 ‘조선 기록 문화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기록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그림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세부 특징을 잘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빨강.파랑.노랑.초록 등 천연색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의궤 소 그림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진을 보듯, 조선시대 국가 행사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각자료입니다. 글자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궤 속 그림은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목적을 가진 행사였는지, 예법에 맞는 의례 절차와 형식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상), 1802년(순조2), 어람용>

1802년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 상.하 2책 중 상책입니다. 세부 의례 절차를 딸 모은 <의주질>에는 국왕의 친영의례 절차를 적은 ‘납비친영의’ 항목이 보입니다. 왕비로 간택된 신부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왕이 직접 나가 신부 부모에게 인사를 올린 후 신부를 데리고 궁걸로 돌아오는 의례입니다. 유교적 생활의례 정착을 위해 왕실이 앞장서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의례입니다.

천하의 모범이 되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유교적 혼인의례로서 신랑이 신부를 직접 맞이하여 오는 친영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그솟에서 생활하는 기존 관습을 따랐기 때문에 친영례는 쉽게 보급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왕실은 앞장서서 왕실 혼례에 친영례를 도입하였습니다. 국왕의 의례는 평범한 사대부의 집에서 개최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왕비로 간택된 신부의 집에 사신을 대신 보냈습니다.이후에는 신부를 위해 별궁을 마련하고, 국왕이 여기로 가서 신부를 맞아 궁궐로 오는 방법을 썼습니다. 덕분에 왕실의 격조를 유지하면서 친영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왕실이 먼저 모범을 보인 결과 18세기 이후에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린 후 신부와 함께 돌아오는 혼인 의례가 민간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입니다. 한번에 3부에서 많게는 9부를 만들었는데, 그중 1부는 왕이 읽어보도록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업무를 맡은 관청이나 국가 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로 보냈습니다. 왕에게 올린 것을 어람용,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것은 분상용(分上用)이라고 합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몇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왕을 위해 만든 어람용입니다. 왕이 열람을 마친 후 어람용 의궤는 왕실의 귀한 물건들과 함께 규장각 또는 외규장각에 봉안하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꺼내보면서 예법에 맞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왕을 위한 책 외규장각 의궤는 후세를 위한 모범적 선례이자 영구히 전해야 할 왕조의 정신적 문화 자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외규장각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