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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황혼

마리아 테레지아(독일어: Maria Theresia, 1717 ~ 1780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마지막 군주였다. 아버지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그 영토를 물려받았다. 카를6세 사후 합스부르크와 혈연 관계가 있던 여러 나라들과 왕위 계승전쟁을 벌여서 왕위를 인정받았다. 힘들게 왕의 자리에 오른 만큼,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내적으로 근검 절약하는 검소한 왕이 되고자 하는 등 계몽적인 면을 보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급진 개혁성향의 아들과 대립하는 등 보수적으로 변했다.

<70.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렬, 구스타프 아돌프 뮐러, 1740년, 동판화>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 황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이 된다. 1740년 1월 20일 새로운 왕에게 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빈 시내 호프부르크 궁에서 성 슈테판 대성당까지 이어졌다. 고위직 관료들이 앞장서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차가 뒤따른다. 빈 마차는 서거한 카를 6세에 대한 추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18세기 카를 6세 황제의 시대, 내정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카를 6세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카를 6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174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맙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기간 왕위 계승전쟁을 치로거서야 그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힘들게 왕의 자리에 오른 만큼,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내적으로 근검 절약하는 검소한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가 머물던 쇤브룬 궁전도 수수한 양식으로 개조하고 진흙에서 추출한 노란색 안료로 벽을 칠해 ‘마리아 테리제아 옐로’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멜베테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고, 아들 요제프 2세 때 벨베테레 궁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며 그 뜻을 이루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1. 마리아테레지아, 마르핀 판 메이덴스 2세, 1745~50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한다. 세 군주국의 위엄은 탁자 위에 올려둔 왕관으로 드러난다.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차례로 놓여 있다. 여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한 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745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프란츠 1세는 정치에 큰 뜻이 없어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운영하며 실권을 가졌습니다. 1765년 갑작스러운 프란츠 1세의 사망으로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합니다.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 왕과 요제프 2세 황제의 독특한 공동 통치가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급진적이었던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은 결국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2. 요제프 2세, 요제프 히켈, 1785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아들인 요제프 2세는 아버지의 황위를 물려받아 176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서재를 배경으로 한 모습은 요제프 2세가 ‘일하는 황제’로 묘사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도와 지구본은 신지식을 섭렵한 군주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황실 휘장이 없어, 그가 허례허식 없는 황제로서 오스트리아 국민 앞에 서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검은 옷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으로 유학 온 프랑스 로트링겐 가문의 9살 연상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다. 가를 6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고, 1736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금술이 좋아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65년, 아들 레오폴트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프란츠 슈테판은 갑작스럽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프란츠 슈테판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어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3. 마리아 테레지아와 평화의여신상, 안톤 폰 마토, 1772년, 캔버스에 유화 스케치>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형 초상화를 위해 그린 스케치다. 1765년 남편 프란츠 1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검은색 상복 차림으로 지냈을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는 모습은 이전에 그려진 강하고 아름다운 군주의 초상과는 다르다. 뒤편에는 날개 달린 아기 천사와 함께 있는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조각상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 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74.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요한 가를 아우러바흐, 1773년, 캔버스에 유화>

<가족들이 있는 부분>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르스티나 대공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5.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르브핑, 1778년, 캔버스에 유화>

마리 앙투아네트로 잘 알려진 마리아 안토니아는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왕비는 실코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76~79, 잔세트,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 1750년경, 금, 자기, 나무>

총 70여 점으로 구성된 아침 식사용 식기와 세면도구 일부로,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됐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침 의례 때 실제로 사용한 용구는 차, 커피, 핫초콜릿을 마시는 데 사용된 각기 다른 종류의 주전자와 그에 맞는 마이센 자기 잔, 설탕 그릇, 숟가락 등이 있다. 이 작품은 녹인 초콜릿을 마시는 데 사용한 잔 세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0~81, 세면도구,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 1750년경, 금, 자기, 나무>

총 70여 점으로 구성된 아침 식기와 세면도구의 일부로,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됐다. 면도용 칼, 거울, 촛대, 대야, 물주전자는 면도 세트로 프란츠 1세의 것이다. 금으로 만든 세면도구 세트는 실제 사용된 것이 나니라 보여주기 위한 물건으로, 이를 증명하듯 닳거나 흠이 난 것이 거의 없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2.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는 함, 18세기 중반, 달팽이 껍데기, 금>

갈고동 껍데리로 만든 함으로, 껍데기를 깎아 타원형 뚜껑을 만들어 열고 닫을 수 있게 경첩과 물결 모양 금장식을 붙였다. 뚜껑에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부 초상을 새겼다. 가슴갑옷과 망토를 입은 황제는 황금양모 기사단 목걸이와 월계관을 썼고 황후는 작은 왕관을 썼다. 조개껍데기와 달팽이를 소재로 한 공예품은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큰 인기를 끌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3. 셔벗용 식탁 장식, 1736~40년, 조가비, 달팽이 껍데기, 금>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으로, 손잡이 기둥에 달린 여섯 개의 고리에는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벗 그릇이 달려 있다. 고리 끝의 장식에는 여성 초상 4점과 남성 초상 2점이 옆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황제 부부와 테레지아를 포함한 세 딸, 그리고 사위 프란츠 슈테판의 초상화이다. 셔벗 그릇은 입술을 금테로 둘렀고 바닥은 잎과 띠무늬 그리고 흉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4. 아프로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있는 술잔, 요한 안드레아스 텔로트, 1679~83년, 은, 부분 은도금,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다이아몬드>

<뚜껑부분>

잔에는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장식되어 있다. 잔 몸통에 장식된 세 개의 원형 창에는 다프네에게 구애하는 아폴로, 다프네를 따라가는 아폴로, 그리고 월계수로 변신하는 다프네가 묘사되어 있다. 뚜껑에는 아폴로가 짝사랑하기 전에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즉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피톤을 격파하는 아폴로, 큐피드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5. 성 안드레아, 카밀로 루스코니, 1705~10년경, 청동>

성 안드레아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다. 그는 X자 모양의 십자강서 처형되어,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 십자가라고도 부른다.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로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중앙통로 벽감에 안치하기 위해 대형 사도 조각상 12점을 주문한다. 이 작품은 실제 대리석 조각으로 작업하기 전 제작한 축소판 모형 중 하나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프란츠 2세(독일어: Franz II, 1768 ~ 1835년)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황제 등을 역임했다.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기 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에 맞서 대프랑스 동맹을 지원했으나 여러차례 패하면서 오스트리아는 크게 약화되었다. 보수주의적 정치 체계를 펼쳤고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약화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다.


<86. 프란츠 2세, 요한 조피니, 1775년,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대공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문해서 그린 초상화이다.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고 있다. 책이 쌓인 탁자에 손을 올린 자세는 그가 후계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대공 뒤 의자에 놓인 삼각모와 흉갑은 기사도적 용기와 고결함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테피스트리 연작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담은 10점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을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판 앨스트가 태피스스트리를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미터였고 모두 합친 총 길이가 42미터일 정도로 장대했습니다. 그중 7점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설치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받았습니다. 교황은 판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7.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야콥 괴벨스 1세, 1600년경, 양모, 실크>

이 작품은 사도 바울이 선교를 위해 아테네에 머물렀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법 평의회 중 광장에서 양팔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에는 불멸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513년 영혼불멸에 관한 칙령을 내린 교황 레오 10세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 중 하나로 프란츠 2세가 1804년 나폴리 왕비로부터 매입하여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8. 기적의 물고기 잡이,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야콥 괴벨스 1세, 1600년경, 양모, 실크>

이 작품은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베드로, 안드레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안드레는 팔을 저으며 풍성한 수확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적을 체험한 후 어부들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된다. 이 기적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사람을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베드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시대의 앙숙, 프란츠 2세와 나폴레옹
1792년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을 때, 유럽 전역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이후 숙적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프란츠 2세의 치세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전쟁은 무려 7차까지 이어졌고, 오스트리아는 연이은 패배로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겼습니다. 더구나 프란츠 2세는 딸마저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하게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고 랄인 지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프란츠 2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영방을 결집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1806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89. 나폴레옹 1세, 아드레아 아피아니, 1805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나폴레옹은 녹색 테두리의 오렌지색 현장을 두르고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북부 이탈리아 치살피나 공화국의 지방총독이었고, 1805년 자신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승급시켰다. 이 작품은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아 아피아니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1805년 나폴레옹의 제1 궁정 화가가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프란츠 요제프 1세(독일어: Franz Joseph I, 1830 ~ 1916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이다. 국가절대주을 도입하여 개혁세력과 마찰을 빚어 혁명가에 의해 왕비가 암살되고 본인도 칼에 찔리 뻔 하기도 했다. 준식민지로 영향력을 행사던 세르비아인들과 갈등을 빚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겼으며 패배후 합스부르크왕가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90.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복, 안톤 우젤&존, 190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군대는 독일 군복과 헝가리 군복을 모두 입을 수 있었다. 이 제복은 헝가리식 제복으로 밝은 회청색 재킷은 기병대의 금몰 장식으로 여미게 되어 있다. 금색 자수로 아칸서스 잎 무늬 계급장을 장식한 옷 소매는 빨간색 깃 장식과 함께 화려함을 더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중 제국 시기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 육군 원수의 계급이었고, 상황에 따라 독일 군복과 헝가리 제복을 번갈아 입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91. 수석총, 콜로드 비주아라, 1857년,>

손잡이를 술 장식이 달린 빨간색과 금색의 실끈으로 감았다. 총신은 음각, 도금, 물결문양 금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총은 튀니지왕 시디 모하메드 2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당시 튀니지에 종주권을 행사하는 튀르키예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튀니지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오스트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92.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요제프 호라체크, 1858년, 캔버스에 유화>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이다.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푸른빛 드레스가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 엄격한 황실은 감옥과 같았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 여행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93. 프란츠 요제프 1세, 미하이 문카치, 1896년경,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후,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했다. 황제으 가장 큰 업적은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빈미술사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19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화가 미하이 문카치는 초상화, 풍경화, 종교화 등으로 유명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94. 스테파니 황테자비, 한스 마카르트, 1881년, 캔버스에 유화>

스테파니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와 17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나이 결혼했다. 꽃으로 장식한 우아한 새틴 드레스를입은 황태자비의 초상화는 약혼을 기념하여 그린 선물이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내연녀 메리 베체라와 동반 자살한 뒤, 스테파니는 재혼해서 헝가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합스부르크 황가의 황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68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릴 만큼 건강했고 황태자 루돌프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 조피 대공비의 지나친 후계자 교육으로 루돌프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1889년 자살해버렸습니다. 황태자를 잃은 황제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차기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그는 강경한 개혁 정책을 내세워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결국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고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됩니다. 결국 황제는 또다시 후계자를 잃고 다른 조카의 아들인 카를 1세를 황태자로 지목하지만 그는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왕정은 끝이 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수도 빈에 위치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수집, 소장했던 컬렉션들을 중심으로 한 종합박물관이다. 16세기 티롤지방을 다르렸던 페르디난트2세는 갑옷, 무기, 회화, 온갖 이국적인 소재의 공예품 등 예술품을 대량 수집했고, 암브라스 성 내에 수집품을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다. 전시공간은 그 구성과 수집품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 오스트리아 최초의 박물관으로 여겨진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집품들을 빈의 멜베테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면서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였다. 19세기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도시 확장 정책으로 빈을 둘러싼 성벽이 철거하고 반지 모양의 도로를 건설했다. 이 도로를 따라 시청, 국회의사당, 대학, 국립극장, 오페라극장 그리고 빈미술사박물관과 빈자연사박물관이 건축되었다.

<확장되기 전 도시 모습>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도시 확장 정책
수도 빈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도시 확장 정책으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빈은 외부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1857년 황제의 명령으로 빈을 둘러싼 성벽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반지 모양의 도로 링슈트라세가 들어섰습니다. 링슈트라세를 따라 이제는 도시 빈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은 시청, 국회의사당, 대학, 국립극장, 오페라극장 그리고 빈미술사박물관과 빈자연사박물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48년부터 68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렸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민족주의가 급부상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시대를 열어 대외적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한편 1857년에는 수도 빈의 도시 확장 프로젝트를 명령하여 장장 30년간 도시 빈을 현대화했습니다. 도시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너비 57미터, 길이 5킬로미터에 이르는 반지 모양의 도로인 링슈트라세를 만듭니다. 도로를 따라 도시 빈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물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빈미술사박물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이번 전시에서는 구한말 고종이 오스트리아와 수교하면서 선물한 갑옷과 투구를 볼 수 있다. 왕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에 준하는 수준높은 작품이다.


<95~97. 투구와 갑옷, 조선, 1890~94년경>


<투구>


<옆에서 본 모습>

1892년 조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과 수교하면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로 조선의 투구와 갑옷을 보냈다. 네 조각으로 구성된 투구의 앞면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뒷면에는 봉황 무늬가 있으며 양옆과 뒤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가리개를 달았다. 갑옷은 상체뿐 아니라 허벅지까지 감쌀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이 직접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투구와 갑옷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더 가까이, 오스트리에 전한 조선의 마음
합스부르크 왕가의 600년 역사 속에 조선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2년,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 상인들이 조선의 개항장으로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교를 맺었습니다. 수교 선물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낸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1894년 합스부르크의 수집품으로 등록됐고, 1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조선이 주고 받았던 마음의 증표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유산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동안 6백년의 긴 시간동안 합스부르크가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술품 수집에 열정을 쏟았고, 뛰어난 수집가이자 후원자라는 또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리적 힘보다 문화와 예술 역량이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합스부르크의 유산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입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감상하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켜낸 예술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3년
  2. ‘빈 미술사박물관’, 위키백과, 2023년
  3.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백과, 2023년
  4. ‘프란츠 요제프 1세’,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