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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 비천당

성균관 강학공간은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강당 앞 마당에 두고 있다. 강학공간 부속 건물로는 장서를 보관하는 대학도서관의 효시에 해당하는 존경각(尊經閣)과 심신을 단련하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보관하는 육일각(六一閣)을 강당 뒷편에 두고 있다. 그리고 성균관 관리들이 근무하는 정록청(正錄廳,), 서리들이 근무하는 서리청(書吏廳), 식당 등 성균관 유생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건물들은 동재 바깥쪽에 배치하고 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두번째 강당건물로 비천당(丕闡堂)을 명륜당 뒷편에 세웠다. 비천당은 과거시험 응시자가 많을 때 제2 과장(科場)으로 활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을 때 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성균관 강학공간의 중심 건물인 명륜당>
명륜당(明倫堂),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인 강당
명륜당은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태조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39년(1606)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대에 경북궁 중건과 함께 크게 수리하였다. 건물은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건물과 양쪽에 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앞쪽으로 넓을 월대가 있다. 협실은 앞면 3칸반, 옆면 2칸의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 추녀마루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잡상들이 있어서, 국가적을 아주 중요한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아침에 명륜당 월대 아래 마당에서 예를 올리고 강당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명륜당 월대 앞 마당에서는 과거시험을 치루는 과거장으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상징적인 건물로 주변 동네 이름도 명륜동이라 불린다.
<왼쪽에서 본 모습>.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가운데 강당건물>
<왼쪽에서 본 모습>
<명륜당 현판>
글씨는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온 학사 주지번의 글씨이다.
<대청마루>
성균관 유생들이 강론을 듣는 강의실이라 할 수 있는 강당의 넓은 대청마루이다. 천정아래에 글들이 적혀 있는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강당 천장과 현판들(가운데)>
<현판들(오른쪽)>
<현판들(왼쪽)>
강당 천장은 서까래와 보가 들여다 보이는 연등천정을 하고 있다.  ‘명륜당’이라고 적힌 현판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강당 천장 아래에는 역대왕들을 적은 글을 비롯하여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문이 닫혀 있는 모습(2009년)>
<추녀마루 잡상>
강당 추녀마루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잡상들이 놓여 있다.
<오른쪽 협실>
앞면 3칸 건물로 2칸은 대청마루,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내부>
<문이 닫혀 있을 때 모습(2009년)>
<왼쪽 협실>
<문이 닫혀 있는 모습(2009년)>
<명륜당 월대>
강당 앞에는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가 있다. 궁궐 전각의 격식을 갖춘 건물 구조로 이곳에서 국왕이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강론을 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를때 사용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매일 아침 월대 아래에서 예를 올리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월대를 오르는 돌계단>
궁궐과는 달리 삼도가 아닌 하나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월대에서 내려다 본 성균관 마당>
<은행나무 사이로 보이는 명륜당>
이곳 마당에서는 주말 전통혼례가 치러진다. 성균관 강학공간 마당에는 두그루의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선비들 선호했던 회화나무 등을 볼 수 있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는 살구나무나 은행나무 등를 심었다. 공자가 제자들을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강학공간을 행단(杏壇)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향교, 서원에는 이를 본받아 대부분 은행나무를 심었다.
성균관 명륜당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을 두었는데, 강당은 정면 3간(間) 측면 3간(間)이고, 좌우 협실은 각각 정면 3간반(間半) 측면 2간(間)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으로 결구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 양측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 두 협실은 명륜당 벽으로부터 정면 2간반(間半)과 측면 2간(間)은 대청이고, 나머지 정면 1간(間) 측면 2간(間)은 온돌방이다. 이들 두 협실은 장대석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초익공으로 결구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명륜당 쪽은 맞배지붕이나 두 끝단에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온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뒤 벽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200명을 한도로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성균관>
성균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
교육기관으로서 성균관의 실질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유생들이 머둘던 기숙사인 동.서재이다. 성균관 강당인 명륜당 앞 마당 동.서쪽에 회랑처럼 나란히 서 있는 건물로 각각 앞면 18칸으로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은 명륜당 마당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 명륜당 방향에는 국왕을 모시고 공식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회랑을 만들어 놓고 있다. 생활공간인 바깥쪽 방향으로는 반칸씩 툇마루를 달아 놓았다. 한옥 건물의 작은 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유생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동.서재 건물은 한양에 성균관이 처음 세워졌던 1398년(태조7)에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6년(선조39)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성균관 동.서재에는 진사나 생원에 합격한 후 입학한 상재상과 선발시험이나 추천에 의해 입학한 하재상들이 기숙하였으며, 전체 정원은 200명이었다고 한다. 상재생들은 하재생들이 머무는 곳에 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유생들은 아침에 북소리가 나면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책을 있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횟수로 출결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1년에 300번 출석을 해야 과거시험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이 머물던 공간인 동재>
생활공간인 동재는 공식행사가 열렸던 명륜당 마당을 등지고 있으며, 별도의 마당을 두고 있다. 동재에는 성균관 관리들의 사무실인 정록청, 식당, 약방 등 생활에 필요한 공간들의 모여 있어 약간 번잡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이며, 하급생들이 주로 머물렀다고 한다.
<성균관 동삼문 옆에 위치한 동재 출입문>
성균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꽤 번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재>
동재는 18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칸이 합쳐서 1개의 방이 된다.
<명륜당 마당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기숙사 방 내부>
<창문>
명륜당 마당 방향으로 작은 창문을 두고 있다. 창문 아래에 아궁이가 보인다.
<툇마루>
기숙사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거나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성균관 동재에 매달려 있는 북>
유생들은 북이 2번 울리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입고 책을 읽기 시작하며, 북이 3번 울리면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동재 맞은편에는 현재 성균관을 관리하는 사람이 머무는 숙소가 있으며, 이곳에서 식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재 회랑>
동재는 경복궁 정전 마당처럼 국왕을 모시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회랑을 구성해 놓고 있다.
<서재>
서재는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중 상급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이다. 관청들과 부속건물이 모여 있어 번잡했던 동재와는 달리 기숙사 건물만 있어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것 같다. 동재와 마찬가지로 마당 방향으로는 회랑을 구성하고 있다.
<서재 회랑>
<서재 마당>
동재와는 달리 왕래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성균관 동재(東齋), 서재(西齋)
대성전 및 명륜당과 함께 태조 7년(1398)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되었다. 동·서재는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의 건물로서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방·장의방·진사칸·하일방·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끝 방을 하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방은 서일방이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다. 유생들은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다. 한편, 유생들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점수를 원점(圓點)이라 하는데, 아침·저녁을 합하여 1점으로 계산하였으며, 이것은 일종의 출석 점수로서 300점을 취득하여야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잘 시행되지는 않았다. 유생들의 글씨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고, 성현을 숭상하지 않는 언동을 하거나 조정을 비방하면 처벌 대상이 되었다. 상론(商論)·재뢰(財賂)·주색(酒色) 등을 말하는 것과, 바둑이나 장기 두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오륜(五倫)을 범하여 이름을 더럽혀서도 안되며, 윗사람을 능욕하거나 사치하여도 안되고 교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처벌을 받았다. 상재생(上齋生 :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은 하재를 방문하지 못하며, 하재생(下齋生 : 사학생도(四學生徒)와 같이 유학(幼學)으로서 성균관에 입학한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식손(食損 :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과 출재(黜齋 :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음.)가 있어서 규율은 엄격한 편이었다. <출처: 성균관>
강학공간 부속건물인 존경각(尊經閣), 육일각(六一閣), 비천당(丕闡堂)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유기관으로 오늘날 대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속건물들을 두고 있다. 명륜관 뒷편에는 성균관 소장 장서를 보관하던 대학 도서관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존경각과 유생들의 주요 소양 중 하나인 활쏘기에 사용할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다. 또한 명륜당 서쪽에는 명륜당 주변 강학공간을 보완하는 건물로 강당격인 비천당과 일양재, 벽입재 등의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일제강점기에 성균관대학 도서관으로 사용되던 비천당만이 남아 있다.
성균관 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효시로 한때 수반권의 장서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존경각은 성종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이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여 최고 교육기관에 걸맞는 도서를 를 갖추게 하였다. 소장 장서는 주로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관련 서적들이었으며, 불교나 도교 관련 및 기술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기에는 수만권의 서적을 소장하였으나, 여러차례 전란과 조선후기 교육재정의 부족으로 소장도서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대출 후 반납하지 않은 서적들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구한말 존경각은 근대교유기관의 도서관으로 변모를 시도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도서를 서울대학교로 강제로 옮겼다고 한다. 존경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대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아마도 고종대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존경각>
존경각, 대학도서관의 효시
명륜당 북쪽에 있는 존경각은 성종 6년(1475)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1만 여권의 책을 하사하였다. 이후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어 복원한 뒤로 왜란(倭亂)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改修)하였다.기본 장서는 사서오경·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儒家)서적 위주였으며, 불교·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다. 장서의 분량은 존경각 건립 초기에는 수만 권에 달했으나, 잇단 전란(戰亂)과 재정의 부족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었다. 고종 32년(1895)에 성균관 학제변경으로 경학과가 설치됨에 따라 존경각은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계승되었으나,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동시에 대부분의 도서가 강제로 옮겨지고, 나머지만이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존경각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嚆矢)로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400여년 동안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출처:성균관>
존경각과 나란히 있는 작은 건물은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던 육일각이다. 존경각과 함께 영조대에 건립된 것이다. 유교에서 활쏘기는 여섯가지 중요한 예 중 하나로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여겨졌다. 성균관에 활을 보관하는 육일각을 둔 것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학문과 함께 체력단련을 위해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육일각>
육일각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창고건물이다.
<대사례의궤>
1743년 윤4월에 영조가 성균관에서 행한 대사례 의식을 기록한 의궤.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고 그 맞힌 수에 따라 상벌을 행하는 의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477년에 처음 대사례가 시행되었으며, 1543년, 1743년, 1764년에 각각 시행된 기록이 있다. 의궤의 앞면 에는 <어사례도>,<시사례도>,<시사관상벌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또 대사례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 시행세칙 및 의례, 관련 경비, 궁시, 과녁 등 행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육일각(六一閣), 육예의 하나인 대사례(大射禮) 기구를 보관하던곳
영조 19년(1743)에 명륜당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禮·樂·射·御·書·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육일각이란 명칭도 육례 중에 하나라는 뜻으로 정해진 것이다. 명륜당 뒤에 육일각을 둔 것은 태학생들에게 글공부와 함께 체력단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으로, 태학생들에게 활쏘기를 권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출처:성균관>
<존경각과 육일각>
명륜당 뒷편에 위치한 비천당은 강학공간인 2번째 강당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조선후기 현종대에 건립된 건물로 제2과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이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과거응시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성균관 명륜당 앞 마당의 공간이 부족했기때문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실과 도서관으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88년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비천당 주변에는 일양재와 벽입재라는 건물이 있어서 별도의 강학공간을 형성했었다.
<비천당>
<앞에서 본 모습>
비천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로 그 기능은 명륜당과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서후기 과거응시자가 급증하면서, 제2과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평소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비천당 현판>
비천당은 승방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제2과거장으로 사용되었던 비천당 앞 마당>
<비천당과 성균관대학교>
비천당, 2번째 강당
현종(顯宗) 5년(1664)에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남은 재목으로는 서쪽과 남쪽의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중건되었다. 한편, 비천당은 과거시험의 응시자가 많으면 제1 과장(科場)인 명륜당과 함께 제2 과장(科場)으로서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명륜전문학교 설립 후에는 주로 교실과 도서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이후에 교실 혹은 도서실 등으로 사용되어왔다. 비천당은 니원(尼院 : 즉, 僧房)을 헐어 낸 목재로 건립하였으므로 주자(朱子)가 말한 “큰 도를 밝힌다.[丕闡大猷]”라는 말에서 그 명칭이 정해지게 되었다. <출처:성균관>
성균관(成均館)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자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공자와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봉사(奉祀)하는 제향기관 성격을 강조할 때는 문묘(文廟)라 부르며 조선시대 최고교육기관을 이야기할 때는 성균관이라 부른다. 성균관은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교육공간인 강당 건물을 뒷편에 배치하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평지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위상이 높은 대성전을 앞쪽에 두고 강학공간인 강당을 뒷편에 배치하였다.  지방 향교도 성균관의 건물배치와 격식을 따랐는데, 대부분 경사진 언덕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대성전이 뒷편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평지에 자리잡은 큰 규모의 향교인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성균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
유학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두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1398년(태조7) 숭교방(현재 명륜동)에 건립한 성균관은 생원과 진사들을 교육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들에게 제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명륜당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였고,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10철, 우리나라 18현 등의 위패를 모셨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사(정2품)와 동지사(종2품)을 겸직으로 두었으나 실질적인 최고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이었다. 그 아래에 사성, 사예, 직강, 전적, 박사, 학정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그 아래 실무관원인 서리를 배속시켰다. 성균관에는 전국의 진사, 생원 중 200명 한도로 엄격하게 선발하여 기숙사인 동.서재에 머물고 공부하였다. 이 중 반은 상재생(上齋牲)이라 하여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이었으며, 나머지는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牲)이라 하여 추천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이다. 성균관은 인재양성과 선현에 대한 봉사의 기능 가지고 있었다. 조선중기 이후 성균관이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기관의 성격보다는 권무세가 자제들의 출세도구로 이용되면서 연구기관으로서 기능이 침체되었다. 반면에 지방에서 성리학 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서원이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지방의 향교와 함께 성균관의 위상도 많이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태학계첩, 1474년>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의 「태학숙록」완성을 기념하여 만든 계첩으로 문묘, 명륜당, 동.서재가 그려져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성균관 친림강론도>
 성균관 마당에서 천막을 치고 강론을 하는 모습이다. 기록적인 의미가 강한 그림으로 참석인물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려대박물관>
<왕세자 성균관 입학식 그림>
효명세자가 8세 (순조17년) 되던 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권학윤음>
 성균관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가 지은 글로서, 사대부 및 거재유생 등에게 학문이 세도에 필요함을 역설하고 학문에 근면하기를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묘 및 성균관(대성전.동무.서무.삼문.명륜당), 보물,
398년(태조7) 건립, 1869년(고종6)중건,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의 중심시설이다. 대성전, 동무와 서무, 삼문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 문묘라 하고, 명륜당은 교육 공간의 중심 건물로서 동재 및 서재 등과 함께 성균관을 구성한다. 2398년(태조7)에 이 건물들을 세웠으나, 1606년(선조39)에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96년(고종6)에 이를 크게 수리한 것이다. 대성전은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그 내부의 중앙과 좌우에는 유학자들의 위패를 순서대로 모셨다. 그리고 대성전에 모시지 못한 위패는 동무와 서무에 모셨다. 삼문은 이곳들로 드나드는 출입구인데, 그 가운데 문은 신령이 지나는 곳을 상징한다. 제사 공간의 뒤쪽에 위치한 교육 공간의 중앙에 명륜당이 있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은 가운데 큰 건물과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건물은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좌의 건물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 기관의 제도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특히 그 건축물의 규모와 격식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는 일반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서울 문묘의 특징이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