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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광장, 수도 서울 중심축인 도심 광장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정부, 육조를 비롯하여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었던 육조거리였던 곳으로 최근 광장을 조성하기 이전에는 넓은 대로가 자리잡고 있었다. 육조거리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한양도성을 동.서로 관통하던 운종가(종로)가 만나는 광화문사거리까지의 넓은 거리로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규모의 큰 길이 있었다. 국왕이 궁궐밖 행차를 할 때 출발하는 지점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을 설계할 때 예법에 따라 설치된 길로 주작대로라고도 한다. 오늘날 광화문 광장 주변은 조선시대 육조거리였던 시절과 성격상 큰 변화 없이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주요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70~80년대 과천청사로, 최근에는 세종시로 정부기관들이 이전하면서 지금 남아 있는 정부기관 건물로는 정부종합청사가 있으며, 정통부 건물은 KT본사로, 문화부 건물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또한 세종문화회관과 주한미대사관 또한 공공기관 성격을 갖은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종로와 만나는 지점까지는 10차선이 넘는 넓은 도로가 있고 울창한 은행나무가 중앙분리대 역할을 했던 것이 광화문대로의 풍경이었다. 최근에는 원래 큰 도로가 있었던 곳에 광장과 공원을 조성하여 2009년에 일반에 개방함으로써 경복궁과 함께 도심의 볼거리로 탈바꿈하였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과 광장을 조성하면서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경복궁 출입문인 광화문이 일직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어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시민에게 도심공원으로 경복궁,북악산과 더불어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이다.

<광화문 광장>

광화문광장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조선시대 동.서를 관통하는 대로인 운종가(종로)와 만나는 광화문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대로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왕이 궁을 나서면서 행차하는 길로 지금과 같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고, 대로 양쪽에는 의정부, 육조를 비롯하여 내각을 구성하는 중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광화문대로와 주변 육조거리 모형>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의 대로를 이르는 명칭으로 의정부나 육조와 같은 국가의 중추적인 관청들이 늘어서 있었다. 높은 장랑이 양쪽으로 열 지어 있는 너비 약 60m의 이 거리는 왕도의 중심가로인 주작대로였다. 이곳은 경복궁과 함께 왕이 사는 도시의 상징이었으며,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거리이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

광화문광장 전체가 자동차도로였던 시절, 섬처럼 우뚝 서 있던 동상이다.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으로 1960년대 말부터 오랜 세월동안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다.

<광장>

충무공 동상 뒷편으로 광화문까지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고, 중앙에 최근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볼 수 있다. 한때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과 북악산을 가로막으면서 위압적으로 서 있었으나, 지금은 확 뚫려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세종대왕 동상>

경복궁 광화문 앞 대로에 2009년 들어서 광장이 들어서면서, 그 중심에 새로운 상징으로 들어선 세종대왕 동상.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든 세종대왕 동상이 이 곳에 서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로 어찌보면 늦은 감도 없지 않다.

<광화문을 이어지는 광장>

<광화문 앞 광장>

조선시대 궁궐을 나서는 왕의 행렬이 출발하는 곳으로 중국 자금성 정문 앞에 조성된 천안문광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2010년 복원한 것으로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문 위에는 2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일제가 철거했던 광화문을 콘크리이트로 복원하여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이때 철거한 부재 중 일부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일제가 광화문을 철거하기전에 일본인 실무자가 정밀한 실측도면을 남겨 놓았기때문에 옛 광화문이나 원래의 광화문이나 그 외형에 있어서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광화문 앞으로 펼쳐진 광화문광장>

조선시대에는 도성 궁궐 정문 대로인 주작대로에 해당하는 큰 길이다. 주작대로 양쪽으로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육조, 한성부, 기로소 등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 KT, 주한미대사관 등 주요 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정부종합청사>

<조선시대 의정부, 육조를 비롯하여 중앙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육조거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물인 정부종합청사. 이곳에는 조선시대 내각이라 할 수 있는 육조 중 종묘제례를 비롯한 국가적인 행사와 교육 등을 주관했던 예조가 있었던 자리이며, 구한말에는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군사기였던 삼군부가 있었다.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남아 있었던 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

조선시대 관아 중 종친부와 함께 남아 있는 건물로 정청인 총무당은 서울 도성 낙산 성곽 바깥쪽에, 부속건물이었던 청헌당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건물로 정부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다.

<사헌부 등이 있던 자리>

정부종합청사 남쪽에는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이곳에는 언론 및 감찰을 수행하는 사헌부와 문무 당상관이면서 소임이 없는 이들에게 명예직을 주어 대우하는 중추부 관아가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70년대에 건설된 이래 오랜 기간동안 국경일날 관제행사의 중심지였다가 도심 속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와 국토의 관리나 공사, 공예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기관인 공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예술의 전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공연이 독점적으로 열리던 곳으로 지금도 수준 높은 공연이 열리고 있다.

<상업용 건물들이 들어선 곳>

정부종합청사에서 병조와 공조가 있었던 세종문화회관까지는 조선시대 육조거리와 마찬가지로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지만, 남쪽편에는 일반 상업용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광화문 사거리 모퉁이>

광화문 사거리 모퉁이에는 작은 골목길을 볼 수 있는데, 인왕산자락에서 발원하여 서울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이 흐르던 작은 개울이었던 곳이다.

<의정부가 있던 자리>

광화문 광장 동쪽편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정부대변인 역할을 했던 공보처, 문화부 등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이 자리에는 정부 최고 기관인 의정부가 있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남쪽에는 주한미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성부 등이 있던 자리>

주한미대사관 옆으로는 국가통신망의 중추를 담당하는 KT본사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정보통신부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와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호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교보빌딩>

KT본사 건물까지는 공공기관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 빌딩인 민간상업용 빌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원로 문신들의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로소가 있었다고 한다. 교보빌딩 앞에는 고종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가 남아 있다.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고종 즉위 4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 와 이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건물을 비전(碑殿). 이 비전은 조선시대 마지막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궁궐 건물의 격식에 맞게 돌난간 등 여러 가지 상징물들로 장식하고 있다.

<열천>

교보빌딩 뒷편에는 이지역을 재개발하면서 조선시대 육조거리 뒷편으로 흐러던 열천을 복원해 놓고 있다. 열천은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경복궁 동쪽을 지나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개천이다.

국가의 중추, 육조거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대로를 육조거리라고 하였다. 이 거리의 동편에는 의정부.이조.한성부.호조.기로소가, 서편에는 예조.사헌부.병조.형조.공조가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의 뼈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주변으로 실무관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관청들은 궁궐 안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궐내각사에 견주어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고종 초년까지 경복궁이 비어 있는 기간에도 육조거리는 한양의 대표적인 관청가로 관원들이 등청하고 퇴청하는 길이요, 예궐하고 퇴궐하는 길이었다. 이 거리는 임금의 명령이 나가고 백성들의 소원이 들어오는 통로로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접점이요, 백성들의 여론이 모이고 퍼지는 분주한 광장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