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한 필암서원(筆巖書院, 사적)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을 모시기 위해서 1590년(선조23)에 세워졌다. 서원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제사를 모시는 기능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갖고 있는데 필암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시되었던 서원이다. 처음에는 장성읍 기산리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인조대에 다른곳에 옮겼으나 수해를 입어 1672년(현종13)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1659년(효종10)에 ‘필암’이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았다.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과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광주, 담양, 장성 등 영산강 중류 지역의 양반문화를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장성 필암서원(사적)>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졌지만 강학공간을 앞쪽에, 제향공간인 사당을 뒷편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홍살문,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 확연루, 강당인 청절당, 사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강당과 문루가 사당을 향하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사당에는 김인후와 사위 양자징(1523~1594년)의 위패가 모셔졌으며, 사당 동쪽에는 보물로 지정된 필암서원 소장 서적과 문서들을 보관하던 경장각과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건물이 있고, 강학공간 마당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서쪽편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숙식하는 고직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확연루>
앞면 3칸, 옆문 2칸의 2층 문루 건물이다. 일반적인 문루와는 달리 사당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열려 있으며, 바깥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남쪽 방향으로는 판문을 달아 놓았다. 서원에서 문루는 강학공간이 강당과는 달리 주위 경치를 감상하면서 손님을 접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확연루 현판>
조선 후기 서인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이 쓴 글씨라고 한다.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는 문루 내부>
사당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난간을 설치하고 바깥 방향으로는 판문으로 막혀 있다.
<문루 내부 천장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
<글이 적혀 있는 현판>
<안에서 본 모습>
창건과 재건
필암서원은 선조23년(1590)에 장성 기산리에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인조2년(1624)에 필암리 증산으로 옮겨 재건하였다. 효종9년(1658)에 전라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원하여 현종3년(1662)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침수의 위험으로 현종13년(1672)에 지금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와 제자인 고암 양자징을 모시는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 속에서도 그 명맥이 유지된 사원이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신문, 동협문, 서협, 전사청, 장서각, 경장각, 진덕재, 숭의재, 청절당, 확연루, 장판각, 한장사, 고직사, 행랑, 창고, 홍살물, 계생비와 하마석 2개 등이 있다. <출처:필암서원>
강학공간
필암서원 강학공간은 강당인 청절사, 유생들이 머물던 기숙사인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건물은 인근 관아 객사로 사용하던 것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강당건물이 사당이 있는 방향으로 북향을 하고 있으며, 마당 양쪽에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어서 마당이 넓고 개방된 느낌을 주고 있다. 사당 앞에는 이 서원에서 소중히 여기는 인종이 하사한 그림을 보관하는 경장각이 있다. 필암서원은 역사적 의미가 큰 인물을 모시는 사당도 중요하지만,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논하는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이 큰 서원이었다.
<필암서원 강학공간>
필암서원은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로 문루, 강당, 사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강당과 사당 사이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필암서원의 건축구조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진 서원으로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주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서원 앞에는 선현의 신위가 봉안된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서원의 정문인 2층 규모의 누각, 확연루가 있다.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공간인 청절당과 공부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서재인 숭의재와 동재인 진덕재가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청절당 앞에는 경장각이 있으며, 사당의 동쪽에는 책과 문서를 보관하는 장서각, 목판을 보관하는 창판간, 노비 가운데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가 있다. 경장각 뒤의 내삼문을 통과하면 제향공간으로서 사당인 우동사와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출처:필암서원>
<강학공간 마당>
강당인 청절루와 사당인 우동사 사이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양쪽의 유생들이 묵었던 기숙사인 숭의재와 진덕재가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강당인 청절당>
진원현 객사 건물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앞면 5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사당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열려 있다. 가운데 3칸은 큰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강당 현판>
‘필암서원’이라고 적혀 있는 강당 현판이다. 현종대에 ‘필암’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강당 대청마루>
송준길이 쓴 ‘청절당’이라 적힌 현판이 가운데 걸려있다.
<동재에 해당하는 진덕재>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이 있다.
<서재에 해당하는 숭의재>
앞면 4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온돌방 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 앞에 세워진 앞면 3칸의 작은 건물인 경장각>
인종이 하서선생에게 하사한 그림(목죽도)을 보관한 곳이며, 정조의 친필편액이 걸려 있다.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시설 스승이다. 인종은 단명하여 오래 집권하지는 못했지만, 명종대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사림들이 크게 존경했던 왕이다. 아마도 김인후가 인종의 스승이었기때문에 후대 사림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고, 그를 모신 필암서원이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자 학문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장각은 하서 김인후 선생을 문묘에 배향코자 할 때 정조가 내린 내탕금으로 세웠으며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점면 3칸에 측면 1칸의 구조이며,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인다. 편액은 정조의 친필 초서이며, 벌레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다. <출처:필암서원>
제향공간,
필암서원에 모셔진 하서 김인후(1510~1560년)는 중종에서 명종대에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호남지방 유림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추앙받는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공부하였으며, 홍문관 등에서 관리를 역임하였다. 지방 수령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주로 학문과 관련된 관직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때 세자시강원에서 인종의 세자시절 교육을 전담하였다. 명종대에 을사사화가 일어난 이후 고향 장성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태극음양설과 관련된 논쟁에서 기대승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정조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곳에 같이 모셔진 고암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자 김인후의 사위로 퇴계 이황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당대의 유학자들인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과 교류하였다. 장인인 하서 김인후와 함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라 할 수 있다.
<제향 공간>
<내삼문과 계생비>
제사에 쓸 동물들을 묶어놓고 검사하는 생단(牲壇)역할을 하는 곳으로 이곳 필암서원에서는 계생비를 세워 놓고 있다.
<사당인 우동사>
하서 김인후 선생과 고암 양자징의 위패를 모신사당이다.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부속 건물.
필암서원에는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과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직사를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들을 두고 있다.
<장판각과 한장사>
사당 옆으로는 하서문집 등을 출판할 때 쓰던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과 관리인 중 책임자 숙소인 한장사가 나란히 있다.
장판각
1971년에 세워졌으며 점면 3칸에 측면 1칸의 구조이다. 장판각 안에는 하서선생전집 목판, 초천자문, 백련초해 등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들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필암서원>
<강학공간 서쪽>
관리인들이 머물던 살림집인 고직사와 행랑채, 문간채, 전사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살림집인 고직사>
<고직사 행랑채>
<고직사 문간채>
필암서원의 조직, 서원의 인원조직은 임원과 유생으로 구성된다.
교수자(임원조직).
- 원장(1인), 경향을 구별하지 않고 지위가 높고 덕망이 훌륭한 자로 천망한다. 임기는 없다. 필암서원지에는 초대원장 동춘당 송준길(1606~1672)부터 한말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민병승(1866~?)의 이름이 기록된 원장선생안이 보존되어 있다.
- 원이(1인), 부원장 격으로 서울에서 지위가 높고 덕망이 훌륭한 사람으로 천망한다. 임기는 없다.
- 진신장의(1인)도장의 혹은 장의대표를 말하며 필암서원 무서 집강안에는 초대부터 조선말기까지의 장의, 색장의 명부가 남아 있다.
- 유림장의(1인). 관내의 유림을 대표하는 장의로 도군내에서 문행이나 신망 있는 자 가운데 천망한다. 동서재에 입재하여 공부하는 유림을 대표한다. 임기는 1년이다. 실적이 우수하면 연임한다.
- 유림색장(2인). 유림 가운데 문행과 신망이 있으며 서원 인근에 거주하는 자 가운데 천망한다. 임기는 1년이며, 실적이 우수하면 연임한다.
- 강수재 강장(1인). 서원 유생들에게 강습을 하는 강사 가운데 대표자를 말하는데 훈장과 같이 사용된다. 필암서원에서는 매월 삭망 분향 후에 강당에서 설강하였다.
- 당장, 원생 관련 사무를 담당한다. 서재 원생 가운데 근면한 자로 서원 근처에 거주하는 자로 한다.
학습자(유생조직)
- 동재 유생, 양반으로 정해진 수가 없다
- 서재 유생, 30명, 평민으로 서원 유지에 보조역할을 하였다.
- 서원입학자격, 서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살펴보면 사마(생원과 진사)에 우선권을 주어 대학(성균관)에 입학하는 것과 같은 수속을 취하고, 이어 사마시의 초시합격자에게도 허락하였으며 비록 불합격하였다 하더라도 향학열이 높고 품행이 있는 자로 유사가 유림의 승인을 받아 입원을 허락하는 경우가 대세를 이루었다.
서원에 소속된 노비
- 필암서원지에는 노 30명과 비 30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암서원 노비안에는 노비들의 성명과 족보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노비제도의 단면을 잘 알 수가 있다.
<출처:필암서원>
<필암서원 유물전시관>
필암서원은 보물로 지정된 많은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서원 관리를 위해 작성했던 문서들이 많아 당시 서원의 교육제도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필암서원이 있는 필암마을>
나즈막한 동산을 등지고 있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장성 필암서원, 사적,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은 하서 선생에 대한 제사의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그밖에 장서 공간이나 지원시설 공간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이다. 이곳은 호남지방의 유종으로 추앙 받는 하서 김인후(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원이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황룡면 증산동으로 옮겨 세웠다. 효종 10년(1659)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수해를 입어 현종 13년(167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없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정문의 2층 누각인 확연루 정면에 나붙은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며, 필암서원 청절당 및 동재와 서재에는 송준길의 글씨로 청철당의 당호와 진덕재, 숭의재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숭의재 옆으로 인종이 하사한 묵죽의 판각이 소장되어 있는 자그마한 경장각이 있는데,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의 어필을 하사한 것이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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