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위치한 전통마을인 묘골마을이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이 살아남은 박팽년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의 2남 박휘순의 처가이 있던 곳으로 그의 부인이 친정인 이 곳에서 아들을 낳고 숨어살다가 성종대에 사면을 받고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달성지역에서도 경제력이 상당히 풍부했으며, 지역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씨가 이 마을을 대표하는 인사로 볼 수 있으며,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도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묘골마을은 박팽년이 후손이 복권되면서 양반가문으로 크게 번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사당인 육신사를 중심으로 큰 규모의 한옥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한옥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최근에 크게 수리한 것이다. 육신사 옆에는 조선중기에 종가 별당으로 지어진 태고정(보물)이 있으며, 그 아래에 18세기에 지어진 고택인 도곡재가 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육신을 모신 낙빈서원이 있으며 그 아래 운치있게 잘 지어진 삼가헌고택이 있다.
<달성 묘골마을>
사육신 박팽년 후손들인 순천박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경제력이 풍부했던 마을로 오래된 고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현재 살고 있는 한옥들의 규모가 큰 편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사육신 기념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삼충각>
사육신 박팽년과 그의 아들, 손자까지 3대가 국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것을 기리기 위해 1835년에 세워졌다.
<마을입구에 있는 큰 규모의 저택인 충효당>
조선후기 인조 때 금산군수를 지낸 후손이 별당으로 지은 건물이다. 살림집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규모의 한옥>
최근에 크게 수리하여 고택의 멋을 느낄 수는 없지만 개량된 한옥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원래 큰 가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있는 한옥들>
마을에는 대부분 규모가 큰 한옥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박팽년 후손들의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한옥 대문 안쪽으로 보이는 모습>
<골목길 안쪽에 보이는 오래된 고택>
<도곡재 솟을대문>
<도곡재>
도곡재는 18세기에 주택으로 지어졌다가 19세기에 후학을 양성하는 재실로 바뀌었다. 안쪽에 살림집인 안채가,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는 마당을 넓게 쓰는 남부지방 양반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도곡대 뒷편에 있는 큰 규모의 고택>
<고택 앞쪽에 있는 사랑채>
2동의 건물이 나란히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랑채이다.
<‘ㄱ’자형 안채>
<묘골마을 골목길>
<태고정(보물)>
마을 안쪽에 있는 옛 종가 별당으로 지어진 고택인 태고정(보물)이다. 태고정은 조선중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조선전기 한옥의 양식이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태고정(보물)>
<태고정 옆에 있는 육신사>
사육신과 박팽년의 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으로 1970년대에 지어졌다.
<육신사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풍경>
<태고정 아래에 있는 육신사 재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낙빈서원>
원래 사육신을 모셨던 서원으로 구한말 훼철되었다가 지금은 강당만 복원되어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낙빈서원 아래에 있는 삼가헌고택>
조선후기 영조 때 (1769년) 삼가헌 박성수가 이곳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인 ‘삼가헌’을 현판으로 걸었다.
<삼가헌 고택 별당 건물이 하엽정>
정자 앞 연못에 심어진 연꽃이 유명하다.
<출처>
- 안내문, 달성군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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