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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외조, 대한문에서 중화문까지

대한문은 삼문이 있는 단층건물이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정전인 중화전 정면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4년 화재로 중화전 등을 재건할 때 환구단을 중심으로 현 시청광장 주변이 도심의 중심지로 바뀌면서 동쪽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서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 서울의 중심 도로인 태평로를 확장할 때 여러차례 이전하면서 현재 위치에 자리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대한문을 들어서면 돌다리인 금천교가 대한문 바로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하루에 세번씩 수문장 교대식을 하면서 옛 궁궐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다.

<덕수궁 대한문>

<안에서 본 모습>

<처마와 공포>

대한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궁궐 정문으로 작은 규모로 단층건물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정전인 중화전이 단층건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한쌍의 석수>

원래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계단이 있었다. 1968년 태평로를 확장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기단과 계단 등은 땅에 묻혔고, 계단에 있던 석수만이 궁궐 정문임을 말해주고 있다.

<매일 3번씩 치러진다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금천교>

덕수궁 대한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궁궐과 바깥세상을 분리한다는 의미를 갖는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금천교가 나타난다.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다른 궁궐과는 대한문에서 정전 정문인 중화문까지 연결된 답도가 없다. 금천교 상판은 마차 2대 이상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며, 가운데를 돌출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금천과 다리>

<금천>

덕수궁 금천교는 인공으로 연못형태로 만들어진 금천을 거너는 다리로 2개의 아치형 홍예로 이루어진 홍예돌다리이다. 다른 궁궐 다리와는 달리 홍예사이에 도깨비 모양의 장식 등이 없다. 다른 금천교에 비해서 장식 등 건축 수법이 떨어지는 것 같다.

<대한문에서 중화문으로 들어오는 길>

<덕수궁 중화문>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출입문과는 다른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다. 팔작지붕에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처마가 날렵하게 하늘로 치켜올려졌다. 출입문 앞에는 답도가 설치된 단층의 계단을 두고 있는데 그 높이는 다른 궁궐에 비해서 낮아 보인다. 원래 정전 출입문 앞 마당은 외조라고 불리며 주요 행사가 많이 펼쳐지는 공간인데, 덕수궁 앞 마당은 그리 넓지는 않다.

<처마와 공포>

<추녀마루 잡상>

중화문 추녀마루 잡상들. 잡상은 기와지붕 추녀마루를 장식하는 10신상을 묘사한 토우로 궁궐이나 국왕과 관련된 전각에만 올려놓을 수 있었다. 자금성 정전인 태화전은 11개, 태화문은 9개, 일반 건물들은 보통 7개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덕수궁도 중화전은 9개, 중화문은 7개, 일반 건물들은 5개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궁궐 잡상은 기존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문 계단에 설치된 답도와 석수(해치)>

구한말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임을 자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궐 건물은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문 앞 계단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웅장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중국 자금성 태화문은 단층에 30여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답도는 공식행사때 국왕의 가마가 지나가는 길로 가마가 지나가는 위치에 놓인 소맷돌과 그 양쪽의 해치형상을 하고 있는 석수로 이루어져 있다.

덕수궁은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정궁이 되었던 궁궐이다. 이때 고종은 덕수궁을 크게 중건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세웠다. 이후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이때 중건한 건물들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은 원해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군이 살던 개인저택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가 이곳에 임시거처를 마련하면서 궁궐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중건하고 거처를 옮긴 뒤 이곳을 경운궁이라 하였다. 덕수궁이란 이름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거처하면서 덕수궁이라 불렀다. 오늘날 덕수궁의 규모는 매우 협소해 보이는데, 이는 정동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던 덕수궁 영역에 열강들의 대사관, 성공회를 비롯한 교회와 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크게 축소되었다.

덕수궁 대한문 일원
대한문(大漢門)의 본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190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족의 인화문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중심이 되자 동문이었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무러앉게 되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 앞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행차로였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