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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고려 상형청자] 신앙으로 확장된 세상
청자는 고려인들의 불교적 세계관을 담는 의례 도구이자, 도교·민간 신앙의 길상과 기원의 상징물, 그리고 사후 세계를 염원하는 장례용 기물까지 신앙적 바람을 표현하는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의례용 기물과 종교적 소재의 그릇이 제작되었고, 불상에도 적용되기도 했다. 특히 상형청자는 공예적 기능을 넘어 종교적 상징과 시각적 경험을 전달하며, 고려인의 창의성과 청자의 표현력을 잘 보여준다. 전시에는 <청자 사라모양 주자(국보)>, <청자 나한상(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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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고려 상형청자]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
상형청자는 실제 사물이나 동물, 식물, 인물의 모습을 본떠 만든 청자를 말한다. 단순히 쓰임새를 위한 그릇을 넘어, 장식적·상징적 의미를 담아 제작된 경우가 많다. 병, 주전자, 향로, 연적 등 기본 그릇에 새, 짐승, 과일 등의 형태를 더하여 새로운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주입구, 손잡이 등을 실제 혀앙과 결합시켜 사질적, 입체적으로 제작한다. 기능과 장식을 결합하여 자유롭고 상징적인 조형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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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고려 상형청자] 상형청자의 여정
고려청자는 강진·부안 중심의 대규모 요지에서 제작되어 국내 귀족과 사찰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으며 일부는 해상무역을 통해 수출되기도 했다.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 청자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충남, 황대도, 경기도 등지에서 소규모 요지가 있었다. 이들 지역은 해안가 가까우면서 떌감과 양질의 흙이 풍부한 지역이다. 서해안 바닷길을 따라 운행하다 침몰한 선박에서 양질의 청자가 발견되어 당시 청자가 유통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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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고려 상형청자] 개경의 중국 자기와 고려 상형청자
고려시대는 중국 자기 문화와 활발히 교류한 시기였다. 고려청자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당·송·원으로 이어지는 중국 자기의 기술과 미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송나라 월주요의 청자, 정요의 백자, 관요와 여요의 청자 등이 고려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월주요의 청자는 고려청자 제작기법, 조형미 등에서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으며 고려청자 고유의 비색청자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는 송, 원과 교역하면 중국 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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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한 사람들
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초원, 사막, 삼림, 북극권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살아왔다. 19세기 후반~20세기에 들어 원주민들은 강제 이주와 보호구역 정책으로 원래 살던 곳에서 밀려났다. 이로 인해 본래 환경과 다른 척박한 땅에서 살아야 했고, 자금자족의 생계 기반이 무너졌다. 20세기 초에는 대부분 임금 노동이나 농업 보조금, 수공예품 판매에 의존했으며 점차 광업, 벌목, 군 목무, 도시노동에 참여하면서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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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하나가 되는 의식
북미 원주민들의 영적인 삶은 자연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공동체적이고 조상과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족마다 신화와 의례를 발전시켰고, 탈·카치나·그림·춤 등을 통해 영적 삶을 표현했다. 호피족Hopi은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주 북동부에 주로 거주하는 푸에블로 계통의 원주민으로, 영적인 전통과 농경 생활을 깊이 간직한 부족이다. 오늘날에도 전통 의례와 카치나 신앙을 이어가고 있으며, 미국 내에서도 가장 전통 문화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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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일상의 예술, 공예
북미 원주민의 공예는 자연 환경과 생활 방식, 그리고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발전했다. 나무, 뼈, 가죽, 조개, 돌, 구리 등 각 지역의 자연자원을 활용하여 실용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지닌 물건들을 만들었다. 남동부, 남서원에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식기, 저장용 항아리같은 토기 공예가 발달했다. 남서부 푸에블로족은 면화로 옷김을 제작했으며 갈대, 풀, 껍질로 만든 바구니 공예가 발달했다. 대평원에서는 들소, 사슴 가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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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탕탕평평] 질서와 화합의 탕평
정조는 현릉원 자리에 있었던 수원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하고 신도시를 건설하고 여러 차례 행차하였다. 이는 정조의 개혁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당시 기득권세력이었던 노론세력을 견제하고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화성행차에는 많은 인원과 물자가 동원되었는데, 당시 행렬에 동원되었던 6,000여명의 인원 중 절반이 정조의 친위부대이 장용영 군사였다. 오늘날 ‘국군의 날’ 행사가 갖는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했으며, 일반백성들이 국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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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탕탕평평] 왕도를 바로 세워 당평을 이루다.
조선시대의 왕위 정통성은 유교적 이념, 특히 성리학에 기반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왕위 계승은 단순한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천명天命과 예법禮法, 혈통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영조는 왕의 종친(형제)으로 왕위를 계승받아 정통성에 결함이 있었으며,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로 정통성에 도전을 받았다. 반면에 장자 계승을 충실히 따른 숙종은 조선시대 국왕 중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차례 실시한 세력교체에도 그…